목련은 지고

2024.04.21 14:22:46

박명애

수필가

봄날이면 그리운 집이 있다. 비가 온다고, 커피향이 그립다고, 책이 눈에 안 들어온다고 이유를 붙여가며 찾아가던 곳. 사월이면 목련의 안부가 구실이었다. '목련이 피었냐'고. '목련이 지느냐'고. 답이 '아직'이거나 혹은 '벌써'라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목련을 기다리고 만나고 이별하러 가던 그 길을 가끔 혼자 걷는다.

글벗의 오래된 이층 양옥 담장 안에는 자주목련이 있었다. 키가 무척 커서 이층 서재 창을 가릴 정도였다. 우리는 보송한 솜털 입은 꽃눈을 보며 봄을 기다렸고 바람에 온기가 실려 오면 꽃을 기다렸다. 은행나무 고사목을 켜 만든 테이블에 오래된 찻잔을 앞에 두고 그저 창밖을 내다보기만 해도 좋았던 곳. 창가와 마주한 벽엔 주인장 솜씨로 그려낸 그림책 주인공인 '파란시간'이 귀엽게 서 있던 그 방을 나는 참 좋아했다.

어느 늦은 봄 밤, 희끗한 꽃잎이 샘가 물그릇 안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우연히 본 이후로 나는 그곳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사위가 어둡고 고요한 가운데 숨마저 참았던 촌음의 시간, 꽃잎과 얕은 물이 만나 빚어내는 미세한 소릿결이 내 귀에 시처럼 들어왔다. 단 한 번의 스침이었다. 그리 자주목련 꽃잎들이 쏟아지면 봄이 저문다는 신호였다.

지금 그 곳엔 사랑했던 이층서재도, 목련도 없다. 재개발지로 편입되며 대문이나 담벼락에 붉은 스프레이로 휘갈겨 쓴 '출입금지'가 늘며 적막해져가더니 지금은 높은 담으로 막아놓았다. 까치발을 띄어도 목련은 보이지 않는다. 담장으로 가려지기 전 빈 집에 홀로 붉게 피던 목련을 바라보다 벗에게 문자를 보냈던가. 그 곁을 지날 때마다 혼자 피고 질 목련을 생각한다.

사실 글벗의 집 목련을 빼곤 자주목련보다 백목련을 더 좋아한다. 훈풍 불면 집집마다 등불처럼 걸리던 소담한 꽃봉오리들. 맑은 새벽 빛나던 그 순백을 사랑한다. 한 때 꽃차에 빠져 있을 땐 목 아픈 데 좋다는 말에 홀려 그 어린 꽃눈을 따던 만행도 저질렀다. 박하처럼 쌉쌀하던 차 맛을 자랑삼아 떠들던 호사는 그해 한번으로 끝냈다. 어리고 여린 꽃잎들을 따 내는 일이 미안하고 죄스러워 목련차를 마지막으로 꽃차 만들기도 그만두었다.

사람처럼 꽃도 자연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각기 다른데 떨어지면 금세 갈변하는 꽃잎 때문에 목련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가끔 본다. 본연의 빛을 잃어버리는 시간이 길든 짧든 자연의 섭리라 해도 이별은 늘 아쉽고 아프다. 내게 사월은 목련이 피어서 그립고 또 목련이 떨어져 아픈 달이다. 목련 꽃처럼 고운 아이들이 푸른 물과 하나가 되어버린 날도 사월이다.

십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월이면 몸살을 앓는다. <목련은 피고 지고>라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테너의 목소리에 내 감정들이 묵직하게 실리곤 한다. '이제는 곁에 곁에 없는데 해마다 꽃 질 때면 몸이 아프다. 어느새 술렁술렁 봄이 떠나간다고 아프게 아프게 목련꽃 진다~' 백목련 지고 나면 자주목련도 지고 사월도 지나간다. 꽃 진 자리마다 새잎 피려니 오늘은 그 벗을 불러 무심천을 걸어봐야겠다. 벚꽃 진자리 푸른 물 번지는 그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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