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즈막재에 서다

2024.04.21 14:21:33

문근식

전 음성군 환경위생과장·시인

해는 병풍처럼 둘러쳐진 서산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지만, 노을은 오늘 하루가 지남이 아쉬운지 나무와 발밑에 조그마한 이름 모를 들풀을 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남산과 계명산이 만들어낸 작은 계곡을 따라 조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면 한적한 토담집 앞뜰에 서 있는 느티나무 가지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던 땅거미 한 마리가 조르르 내려온다.

어둠에 자리를 내어준 저녁 해가 길게 늘어트린 하루의 꼬리를 거의 거두어 갈 즈음 무리에서 떨어진 기러기 한 마리가 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어둠에 놀란 땅거미가 서둘러 제집으로 돌아가면 이제 그 역할을 다한 빛들이 하나둘 힘겹게 쥐고 있던 시간의 손을 놓는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도시와 주변의 산들을 바라본다.

아직 가지만 앙상한 떡갈나무 아래로 금방이라도 우렁찬 함성과 함께 말을 탄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이 한껏 위용을 자랑하며 발아래 도시를 지켜보고 있는 남산 성, 멀리 겹겹이 펼쳐진 산과 산 그 사이 몽글몽글 일렁이는 안개 다리를 힘겹게 넘어가는 저녁노을, 가만히 귀 기울이면 두고 온 고향 어쩌지 못할 향수를 달래던 우륵 선생의 가야금 소리가 잔잔한 물결에 반사되어 가슴을 헤집어 오고,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배수진으로 죽음을 택한 수많은 젊은 영혼들의 몸부림에 노을도 숨죽인 탄금대. 내려다보면 굽이굽이 흘러드는 남한강 자락에 오래된 시간을 싣고 떠 있는 빈배 한 척, 들러보면 온갖 사연들이 만들어낸 이곳 마즈막재,

옛날 재 너머 어딘가에 형장이 있어서 한번 넘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마즈막재, 지금은 많은 사연과 슬픔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사연도 없는 것 같은 평온함이 지명과 어우러져 아늑하고 쓸쓸한 이른 봄 정취를 연출하여 여유를 잃어버린 도시인들이 잠시나마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사색을 즐기게 한다….

예전에 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의 왕래가 뜸한 낮과 밤의 중간에 서서 붉게 타는 저녁노을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밤 안개가 파도처럼 몰려와 슬픈 이야기들을 전해주고 간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넘어 처형장으로 끌려갔을까.

모두 다시 돌아올 수 없음에 두고 온 어머니,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자식들 생각에 몇 번이나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얼마나 많은 눈물 흘렸으며, 걸어서 한 시간쯤 걸렸을 이 산길이 얼마나 짧게 느껴졌을까. 모두 체념하고 돌아서는 길 돌부리 하나 풀 한 포기도 그 얼마나 소중히 눈에 담아두고 싶었을까.

아무런 미련 없이 어둠에 자리를 물려준 태양처럼 모든 것을 체념하고 원망 없이 이 고개를 넘어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진 후 그래도 아쉬움에 이름 없는 들풀이 되어 그리운 이들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무서우리만큼 고요한 정적 속으로 한발 내딛는다. 가지마다 돋아나는 새싹 들의 속삭임이 어둠 속에서 들린다.

살면서 수없이 넘었던 이 고개가 오늘따라 낯설다. 오래 팔짱을 끼고 노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어둠이 서둘러 사람들을 지우고 그 속으로 몇 대의 자동차가 사라진다. 세상도 나도 없는 어떤 공간으로 느리게 시간이 지나간다. 시간에서 내가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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