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우화교 비문을 쓰다, 정조 스승 남유용

2016.01.05 14:41:34

조혁연 객원 대기자

조선 영조 9년(1753) 단양 읍내에 우화교(羽化橋)라는 다리를 세운 인물은 당시 군수 이기중(李箕重·1697~1761)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영조 10년 다리 건립을 기념해 우화교 신사비(新事碑)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는 당시 우화교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그만큼 컸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당시 우화교는 죽령과 한양을 잇는 도로, 즉 봉화대로에 위치하면서 경상도 북부 사람들에게 상경과 귀향에 따른 교통 편의를 제공했다.

현재 우화교 비문의 일부에는 '圻湖之客循竹嶺而左者 必由是達焉 然登橋而望 林峀幽O O沙脩潔 如入天台武陵之路 故好事者名之曰羽化'(기호지객순죽령이좌자 필유시달언 연등교이망 임굴유O O사수계 여입천태모릉지로 고호사자명지왈우화) 명문이 보인다.

대략 '기호의 나그네가 죽령을 넘으려면 이곳(우화교 지칭)을 반드시 거쳐야 하고 다리에 올라 바라보면 산림은 그윽하고 개울 모래는 깨끗하니 마치 천태 무릉도원에 이르는 길과 같다. 호사가들은 이 다리의 이름을 우화라고 부른다' 정도가 된다.

단양 우화교 신사비 모습. 전면에 羽化橋, 후면에 新事碑 글자가 전서체로 써있다.

우화교 신사비는 화강암 재질에 높이는 115㎝ 정도이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옛 군청 자리로 옮겼다가 1990년 하방리에 수몰이주기념관이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우화교 신사비의 비문 글씨를 쓴 인물은 영조대의 문신 남유용(南有容, 1698∼1773)이다. 그는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의령, 호는 뇌연(雷淵)이다. 특히 그는 뛰어난 성리학적 지식을 인정받아 1754년 영조의 원손(元孫), 즉 정조의 보양관(輔養官)이 되었다.

보양관은 조선시대 세자 ·세손의 교육을 맡는 관직으로, 이조 소속의 관료 가운데 덕망과 학식이 풍부한 인물이 발탁됐다. 조선 전기에 두각을 나타냈던 조광조·이자·남곤 등도 보양관 출신이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뒤늦게 자책했고, 그에 비례해 원손인 정조를 애지중지 하였다.

당시 정조의 보양관이 바로 남유용이었다. 그는 정조를 세살때부터 무릎 위에 앉히고 가르쳤고, 영조는 그를 만나면 원손의 행동발달 상황을 물었다.

영조: 상견례 때에 원손이 절차를 이루었는가.

남유용: 낯설어하지 않고 무릎을 모으고 절하였습니다.

《영조실록》30년 11월 17일자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영조는 정조의 예의 범절을 주시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정조가 공부를 잘 하는지 여부를 다시 남유용에게 묻는 내용이 등장한다.

영조가 남유용에게 시권(試券)을 가져오게 하여 몇 자를 물어 보니 원손이 환하게 알았고, 또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외라고 하니 원손은 틀리지 않고 외었다. 그후 영조와 남유용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간다.

영조: 읽는 소리가 쇳소리처럼 쨍쨍하다. 경이 고송(考誦)할 때에 혹 하생을 내었는가.

남유용: 늘 잘 외기 때문에 하생을 내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영조실록》 33년 10월 19일자의 대화 내용이고, 하생은 점수를 박하게 내려 학습을 독려한다는 의미다. 명필가이기도 했던 남유용이 어떻게 단양 우화교의 전서체 비문을 썼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그는 우화교 비문을 쓴 이후인 영조 15년(1739) 영춘현감을 지낸 바 있고 이때 단양을 유람한 후 한시를 다수 남겼다. 그는 50살이 되던 해에 우리고장 충주목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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