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충청도 사또들, 매를 집단으로 맞다

2015.11.10 13:57:39

조혁연 객원대기자

[충북일보] 농업은 전근대 사회를 통틀어 국가재정의 밑바탕을 차지했고, 따라서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리 시설의 개설과 유지·보수는 국정의 우선순위를 차치하였다.

수리시설 가운데 제언(堤堰)은 벼 재배와 불가분의 관계인만큼 그 등장 시기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이 듣던 수산제·벽골제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대국가 단계인 삼국시대 들어서면 제언에 대한 기록이 부쩍 증가한다.

이는 삼국이 공통적으로 미곡을 조세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통일 신라시대에는 인공 제언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논을 '오답(奧沓)'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수리시설이 발달하면서 고려시대에는 산전(山田)이 개간되었고 고려 후기에는 저습지와 연해지 개발이 가능해졌다.

조선시대 역시 제언은 축조와 관리에 많은 비용과 노동력, 그리고 기술이 투입되었고, 따라서 제언의 건설 및 유지 관리는 보통 국가가 담당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문헌과 지도에는 제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1872년 청주목지도>를 보면 당시 관내에는 남일면, 북강내일면, 산외일면, 북강외일면, 북강외이면, 북강내이면, 수신면(현 천안시), 서강외이면, 서강외일면, 서강내이면, 남이면 등에 11개의 언(堰)이 존재했다.

조선시대 태형을 맞는 모습

조선 전기의 조정은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지방관[외관]을 통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감찰관료를 파견하였다. 이를 수행한 선초의 관료로 '행대'(行臺)가 있다. 행대는 사헌부 소속의 관료로, 달리 '행대감찰'(行臺監察)이라고도 불렸다.

행대의 주요 감찰 내용의 하나가 사또들이 제안 축조 여부와 관리를 잘 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사또는 한자 '使道'에서 온 표현으로, 고을의 원님을 존대하여 부르는 말이다.

태종 대에 정길흥(鄭吉興)이라는 인물이 충청도의 행대로 파견됐다. 그가 우리고장을 둘러본 후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청주목사 김매경(金邁卿)·판관 윤번(尹O)·충주판관 장안지(張安之)·진천현감 진운수(秦云壽)·죽산현감 김종서(金宗瑞)에게 각각 태(笞) 50대를 때려서 환임시키고, 판충주목사 한옹(韓雍)·전 청주판관 송포(宋褒)는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니, 행대(行臺) 정길흥(鄭吉興)이, 김매경 등이 제언(堤堰)을 수축하지 않았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태종실록 18년 1월 17일자>

청주목사는 정3품, 판관은 종5품, 현감은 종6품의 품관을 지녔다. 이런 고관들이 제언을 축조하지 않는 등 가뭄 대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태(笞)를 집단으로 맞았다. 환임은 근무지로 되돌려 보낸다는 뜻이다. 전통시대 우리나라의 형벌은 오형(五刑), 즉 태(笞)·장(杖)·도(徒)·유(流)·사(死)가 기본이었다.

태형은 작은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5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로 편형(鞭刑)이라고도 불렀다. 이런 태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10대~50대까지 5등급으로 나누어 집행하였다. 따라서 청주목사 김매경이 한양도성으로 끌려가 50대의 태를 맞은 것은 그 죄가 중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흔치 않은 충청도 사또의 집단 태형 사건은 조선 정부가 제언 축조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궂은비'가 왔으나 '실비'처럼 내리면서 '약비'가 되지 못했다. 궂은비는 오랫동안 내리는 비, 실비는 가늘게 오는 비, 약비는 꼭 필요할 때 내리는 비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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