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제목을 잘못 냈다가 귀양생활, 충주 김시양

2015.11.05 19:04:43

조혁연 객원대기자

[충북일보] 조선시대 전국 각도에서는 식년시(式年試), 즉 3년마다 한번씩 문과 초시에 해당하는 향시(鄕試)를 치뤘다. 이때 과거 시험장의 감독관은 관찰사나 도병마사가 맡았다. 그러나 응시생이 많은 지역에는 서울에서 경시관(京試官)이 파견됐다.

조선 선조~인조 대의 인물로 김시양(金時讓·1581-1643)이 있다. 그의 호는 하담(荷潭)으로 비인현감을 지낸 인갑(仁甲)의 아들이다. 그가 광해군 대에 충홍도 경시관이 돼 우리고장에 파견됐다. 당시 충청도는 어떤 역모사건이 있었는지 도명(道名 )이 '충홍도'로 개호돼 있었다.

그는 이때 향시의 제목으로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臣視君如仇讐]'를 냈다. 이 표현은 맹자 '군시신여초개 신시군여구수(君視臣如草芥 〃)의 뒤 부분이다. 해석하면 '임금이 신하를 초개와 같이 보면, 신하도 임금을 원수같이 본다'는 뜻이 된다.

초개는 풀과 티끌이라는 의미로, 임금은 절대 권력을 지녔지만 신하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뒷부분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만을 취하면 국왕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응시생들의 항의가 빗발치는 등 시험장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충홍도의 경시관이 되었을 때는 '신하로서 임금을 원수처럼 본다(〃)'는 논제를 내어 그 당시의 선비들이 지금까지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광해군일기 4년 8월 29일자>

김시양은 그 직후 또 한번의 과거시험 파동에 휘말렸다. 그는 이번에는 전라도 지역의 경시관으로 파견됐고, 이때 '사로가 유씨를 멸망시켰다[四老滅劉]'를 과거 시험을 제목으로 냈다. 이 표현은 두보의 시 '제사호묘(題四皓廟) 부분인 '사로가 유씨를 위했다지만 그것이 멸망이었네'에서 취한 것이다.

그러자 당시 응시생들이 이번에는 "이 제목은 당대의 일에 가까운데 어째서 냈습니까"라고 항의했다. '당대의 일'은 광해군의 실정을 지칭한다. 이번에는 더 격렬한 항의가 일어났고, 일부 응시생은 과거 시험장을 박차고 나가려고 하였다. 김시양은 결국 제목을 '당태종 명사직서'(唐太宗命史直書)로 바꿔야 했다.

'유생들이 두 세 번을 다시 고쳐주기를 청하였고, 결국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는 상황에까지 이르러서야 고쳐졌는데, 또 <당태종 명사직서(〃)>로 논제를 내었습니다.'-<하담문집 임자일기>

결국 의금부는 당시 과거시험 파동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는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가야 했다. 그가 왜 논란이 있는 제목을 두 번씩이나 냈는지 사료 상으로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돼 해배됐고, 이후 생활은 청렴했다. 호 하담은 지금의 충주 금가면의 남한강변에 위치한 지명으로, 그는 말년에 충주로 돌아왔다.

괴산 능촌의 김시양 신도비

도문화재자료 제 62호

'반정 이후에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여러 차례 지방을 맡아 다스렸는데 상당히 치적이 있었으며 청렴하고 간소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상이 매우 깊이 돌보고 사랑하여 몇 해 사이에 병조 판서와 체찰사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나중에 청맹과니로 충추에 물러나 살다가 이때에 죽은 것이다.'-<인조실록 21년 5월 13일자>

괴산 능촌을 가면 그의 묘와 신도비(도문화재자료 제 62호)를 만날 수 있다. 신도비는 1670년 당대 명문장가인 조경이 지었고 글씨는 당시 최고의 서계가인 이정영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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