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왜 옥천 청성에 굴산성을 쌓았을까

2015.11.03 16:05:21

조혁연 객원 대기자

[충북일보]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의 이성산성(已城山城)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굴산성(屈山城)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해졌다. 옥천군과 국강고고학연구소는 최근 발굴 성과를 발표, "이성산성의 서쪽 성벽 25m를 발굴 조사한 결과 성벽의 흙에서 섞여 나온 유물로 미뤄 5세기 신라 토성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이성산성은 해발 115∼155m의 구릉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전체 둘레는 1천1백40m이다. 이밖에 성벽의 너비는 하단부를 기준으로 최대 15.4m이고, 높이는 약 3.5m에 이르고 있다.

굴산성에 대한 역사시록은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8년조에는 "정월에 이찬 실죽을 배하여 장군으로 삼고, 일선 땅의 정부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굴산의 두 성을 고쳐 쌓았다(春正月 拜伊·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ㆍ屈山二城)"라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는 "기산현은 본시 굴현으로서, 경덕왕이 기산으로 개명했고 지금은 청산현이다"(耆山縣 本屈縣 景德王改名 今靑山縣)라고 기록했다.

두 문헌기록은 △신라가 소지마립간 때 굴산성을 개축하였고 △그 굴산성은 청산현에 위치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굴산성은 문헌에서 사라지고 조선 전기가 되면 청산지역에 사성산석성(巳成山石城)과 기성산성(己城山城) 지명이 등장한다.

옥천 이성산성의 최근 발굴 모습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사성산석성(巳成山石城)이 현의 서쪽 6리에 있고, 둘레가 3백 37보이며 지세가 험조하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이 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기성산성(己城山城)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91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또 군창이 있다'라고 기록했다. 지금의 이성산성을 두고 사성산석성과 기성산성 등 2개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한자 已(이)·巳(사)·己(기) 등이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종의 해프닝이다.

이와 관련해 이성산성=굴산성이라는 견해가 이전부터 존재해 왔고, 그 중심에 고 이원근 박사가 있다. 그는 1981년에 발표한 '삼국시대 성곽연구' 제목의 단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에서 이성산성이 굴산성일 가능성을 직접 거론했다.

그는 그 이유로 신라계 토기편, 판축공법, 경주 월성 못지 않은 계획적인 축성, 지리적으로 신라가 쌓은 삼년산성과 가까운 점 등을 들었다. 30년전 그의 이같은 견해는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와 거의 일치한다.

그의 논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라가 청성면 산계리에 굴산성을 쌓은 이유도 지정학적으로 분석하였다. 그의 논문에 의하면 산계리의 본동 마을을 '성안' 부락이라고도 불리고 있고, 여기서는 동에서 서류하는 보청천을 조망할 수 있다.

이같은 지형에서 토성 강안의 높은 성벽에 올라서면 보은으로 향하는 대로를 시야에 둘 수 있고, 또 정남으로 향하면 영동 용산면을 거쳐 황간으로 직행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에게 있어 옥천 이성산성은 보은 삼년산성이라는 든든한 배후를 업고 있으면서 동시에 백제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했다. 백제 성왕이 이성산성 인근의 옥천 구진벌에서 신라 매복병에게 참수당한 것도 이같은 지형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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