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때의 옥천역모, 모두 7명이 처형되다

2015.10.13 15:39:07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조선 인조 때의 옥천지역 역모사건과 관련해 권대진, 정한, 양천식 위로로 서술을 했다. 그러나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추안급국안 등을 종합하면 당시 역모사건에는 총 32명이 연루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옥천 10명, 합천 6명, 나머지는 전라도, 경상도, 청주 등이다. 청주에서는 조철이라는 인물이 당시 역모사건에 가담했다.

옥천 가담자가 가장 많은 것은 권대진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가장 컸음을 의미한다. 옥천 가담자 가운데 권대진, 권락, 권계, 권순, 영이, 박선검, 박준검 등 7명은 처형됐다.

권락, 권계는 권대진의 아들이고 권순은 조카이다. 이밖에 영이는 권대진가의 노비이고 박선검, 박준검 권대진가의 보인이었다. 보인은 대신 병역의무를 지는 것을 말한다. 권락, 권계 형제는 아버지(권대진)의 역모 도모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들이 말하기를 '양천식·양정식 및 이찬희 등이 모의를 주도하고 있는데, 도당들이 매우 많다. 그런데 먼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병사를 일으켜 왜적들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왜적을 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성을 치기로 약속이 되었다.' 하고….'-<인조실록 9년 2월 3일자>

인조조의 옥천지역 역모사건에는 청주출신 조철도 가담했다.

인용문의 '그들'은 권락, 권계 형제를 일컫는다. 그러나 조카 권순은 "대진이 숙부라고는 하나 서로 자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또 나는 글도 모르고 무예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일에 참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며 역모 가담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으나 목숨을 부지하지 못햇다.

조철은 옥천 권대진보다는 떠돌이 요승 양천식에게 포섭됐다. 양천식은 문초가 시작되자 "다시 청주(淸州)로 내려가 출신(出身) 조철(趙澈)을 보았는데, 이 자는 8대장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자에게 간 이유는, 안국이 전에 조가란 자가 거사를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자의 관상을 보아두려고 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공초(답변)했다.

32명의 당시 역모사건 연루자 가운데 적어도 사료상으로 체포되지 않았고, 따라서 처형되지 않은 인물이 있다. 앞 인용문에 거론된 '안국', 즉 김안국(金安國)이라는 인물이다. 그 역시 승려 출신이었다.

'안국이 처음에 정한을 보고서 그의 뜻을 탐지할 목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양후영(楊後瑩)이라 하고 그를 보며 말하기를 '최영(崔瑩)의 후신이 이제 또한 있다.'고 하자, 정한이 '북쪽 지방에 변란이 일어나면 우리들이 남쪽에서 일어나겠다. 남쪽 지방에 변란이 일어날 때에도 마찬가지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안국의 승명(僧名)은 회옥(懷玉)이며, 양시태는 안국의 친구로서 공모한 자입니다.'-<〃>

김안국은 어찌보면 정치의식이 강했고, 따라서 양천식을 선도한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는 양천식이 제문 내용의 이상함을 질문하자 "대북(大北)·소북(小北)이 다 모여 대사를 거행하려고 한다."라고 말해, 역모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명종조에 우리고장 충주에서 이홍윤 옥사사건이 일어나면서 고을이 텅 비다시피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당시 옥천에서도 결코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당시 역모는 대북파가 소외감 때문에 일으킨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당시 원혼들을 위로하는 의식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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