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에 '삼포왜란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이유는

2015.09.29 16:59:04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나말여초에 극성을 부렸던 왜구는 정규 군인에 가까운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공민왕은 왜구의 노략질을 피하기 위해 백두대간에 원관(院館)을 세운 후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초점'(草岾)을 통해 운송토록 했다.

'초점'이 새재와 조령의 지명어원이 됐다. 순우리말 '새'는 풀을 의미하고, 그 사례로는 '이엉새'와 '억새'가 있다. 지붕 위에 얻는 풀이 '이엉새'이고, 억센 풀이 '억새'이다. '조령'은 순우리말 '새'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지금도 조령 문경 사면의 지명은 '초곡'(草谷) 또는 '푸실'로 부른다. '초곡'은 '푸실'을 한자로 음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래는 '풀실'이었으나 ㄹ음 탈락현상으로 '푸실'이 됐다. '풀'은 '草,' '실'은 골짜기(谷)라는 의미다.

《고려사》에는 2인자 신돈(辛旽·?-1371)이 수도를 개경에서 우리고장 충주로 몰래 옮기려다 공민왕에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등장한다. 신돈은 충주가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의 노략질로부터 안전하고, 또 남한강 물길을 통해 경상도 세곡을 용이하게 운반할 수 있는 점을 고려했다.

조선 초기의 정부는 강경책보다는 온건책을 구사하여 부산포·내이포(지금의 진해)·염포 등 이른바 삼포를 왜에게 개방했다. 그 결과, 삼포에 60여 명의 왜인이 상주할 수 있도록 허락됐다. 그러나 반정으로 보위에 오른 중종은 외교적인 혜택을 몰수하는 등 삼포의 왜인에 대해 강압적인 정책을 폈다.

이에 반발해 1510년(중종 5) 4월 내이포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 4-5천 여 명이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성 밑의 민가를 모조리 불사르고 곧 성을 함락할 태세였다. 조정은 최임 등을 파견해 소탕작전에 나섰고, 조선군은 대승했다.

'1872년 충주목지도' (부분)의 충주옥. 당시 왜인들은 이같은 옥에 수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19일 진시에 교전하여 신시에 싸움이 끝났는데, (…) 좌·우도 병선 합계 30여 척이 바다로 들어가고, 황형·김석철·유담년은 세 길로 나누어 육지로 쫓아 들어가 쳤는데, 맞아 싸운 자는 모조리 잡히고 달아나서 배를 타다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적선 3척이 침몰되고 배를 타려는 자가 있으면 왜구가 저희끼리 칼을 뽑아 팔뚝을 쳤습니다."-<중종실록 5년 4월 22일자>

인용문의 '저희끼리 칼을 뽑아 팔뚝을 쳤다'는 일본으로 탈출하는 배가 정원을 크게 초과하면서 조선시대판 '보트 피풀'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또 '맞서 싸운 자는 모조리 잡히고'라는 표현은 당시 전투에서 왜인 포로가 많이 발생했음을 나타낸다. 이들이 우리고장 충주로 송환되면서 전쟁 포로수용소가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전교하기를, "갇혀 있는 왜인 등이 도둑질을 꾸민 사유를 알지 못한다 하니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충주에 가둔 왜인을 서울로 잡아 올려 추문하는 것이 또한 어떠한가." 하자, 김수동이 아뢰기를, "충주에 가둔 왜인은 반드시 잡아 올릴 것이 없고, 본주(충주 지칭)에 두고 추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중종실록 5년 4월 23일자>

삼포왜란의 포로를 충주로 송환한데는 대략 2가지 정도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과 신돈의 사례에서 보듯 충주는 내륙에 위치하기 때문에 왜구의 준동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이밖에 왜인 포로를 충주 이북으로 압송하지 않은 것은 상경로에 대한 지리적 기밀이 탐지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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