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그곳 Ⅱ

2024.07.21 15:16:22

박명애

수필가

단조로운 잿빛 구름으로 굴곡 없이 꽉 채워진 하늘은 무표정하다. '무농정'이란 이름이 내게 주는 느낌처럼. 비문에 쓰인 유래나 자료들을 통해 알게 된 '무농정'은 필요할 때 꺼내보는 사전 속의 단어 같다. 큰 마을을 뜻하는 '대멀'이 변해서 '대머리'로 불리던 이곳의 옛 이름이 내게는 친근하다. 늘 이름 앞에 '대머리 사는 ㅇㅇ'이라고 불리던 단발머리 내 친구가 살던 곳 나만의 그곳이다.

우리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동생들의 나이 터울과 성별까지도 데칼코마니처럼 일치했고 맏이가 지닌 무거움과 외로움에 공감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고작 열여섯이었는데 친구는 내게 산 같았다. 엄마가 편찮으시다 보니 휴일이면 친구 집 마루에는 일주일 동안 빨랫감이 산더미처럼 모였다. 빨랫감을 나누어 들고 개울가에 가면 손도 대지못하게 말렸지만 나중엔 슬쩍 옷을 헹구거나 비틀어 짜 바위 위에 올려두는 나를 보고 언니처럼 웃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론 엄마에게 미안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사실 동생들에게 치이기도 싫고 휴일엔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는 암묵적인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핑계를 대고 나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무작정 자전거를 타고 나와 무심천을 달리다 보면 닿는 곳이 그곳이었다. 집안일이 많은 친구를 따라다니며 서툰 솜씨로 돕다 보면 한나절이 훌쩍 지나갔다. 식구들 점심을 지어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야 우리에겐 짧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 자전거를 타고 동네와 반대편에 있는 너른 들판으로 내달렸다. 집에서 누군가 찾아도 보이지 않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우리 둘만의 공간이었다. 여름날이면 좁은 도랑에 발을 담그고 나란히 앉아 학교에서 배운 가곡을 불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당시 나는 슬프고 애잔한 정서가 담긴 시와 노래를 좋아했다. 김소월 시 <개여울>에 곡을 붙인 정미조의 노래를 즐겨 흥얼거렸는데 꼭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한 구절이 끝나면 친구가 등을 때렸다. 지금 생각하면 음정도 박자도 엉망이었겠지만 '인생도 노래 따라간다고 슬픈 노래를 부르면 슬픈일이 생긴다'고 엄마 말을 빌어 어른 같은 소리를 했다. 친구는 <비둘기집>이란 노래를 즐겨 불렀다. 안경 너머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 '메아리 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에서 풀피리처럼 가늘어지던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도 생생하다. 발가락을 스치던 어린 송사리들의 꼬물거림도. 어느 날인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 소나기가 장맛비처럼 내렸다. 어둑해진 도로엔 사람도 없고 버드나무 긴 가지들이 엉켜 부대는 소리만 가득해 을씨년스러웠다. 그때 나도 모르게 <비둘기집>을 반울음 섞인 소리로 부르며 무거워진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돌이켜볼 때마다 부끄러운 한 장면이지만 당시엔 마음이 안정되며 기분이 좋아졌다.

선 자리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는 공원의 나무들처럼 우리도 각자의 속도로 걸으며 멀어져 갔다. 세월이 흐르고 바뀌는 풍경 안에서 새 벗과 밥을 먹고 카페에 앉아 정담을 나누며 보낸 시간들이 훨씬 긴데도 불구하고 그곳은 그녀에게로 가는 특별한 통로 같다. 그 언저리를 지날 때면 기억은 늘 그 시간 속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그곳의 그녀를 만나러 간 나를 기다려주는지 옆에 있는 벗도 말이 없다. 비가 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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