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자를 들어 보이는 아이들

2024.05.09 14:22:11

심재숙

시인·한국어 강사

오늘 한국어 수업 시간에 정원으로 꽃구경을 나갔다. 바람만 드나들던 나뭇가지에 하얀 벚꽃이 필 때도 우리들은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었다. 봄이 어른의 보폭으로 성큼 다가선 정원에는 등나무꽃이 주렁주렁 소담스럽게 피었고, 영산홍은 초록 이파리 사이에 빽빽하게 박혀 있었다. 할미꽃은 벌써 자취를 감추고 하얀 머리카락만 바람에 흩날렸다. 정원 안쪽에는 민들레꽃 진 자리에 둥글게 부푼 민들레 홀씨 방망이들이 옹기종기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를 방금 꽃구경을 나온 아이들이 달려가 홀씨를 날리기 시작했다. 후후 민들레 홀씨를 날리는 아이들의 동그란 입에서 바람이 나가자 홀씨들이 리듬을 타고 춤을 추며 날아갔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갑자기 우크라이나에서 온 아이가 홀씨를 꺾어 다가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무릎은 세워 양손으로 홀씨 방망이를 들어 올리며 '저랑 사귀실래요?' 했다. 잠시 어리둥절했던 나를 보며 아이는 더 큰 소리로 '저랑 사귀실래요?' 하며 민들레 홀씨를 내가 받을 때까지 들어 올리며 기다렸다.

초등학교 2학년, 아직 한국어가 서툰 아이의 입에서 유창하게 나온 '저랑 사귀실래요?' 라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비교적 말이 유창한 아이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성격 덕분인지 대화가 잘 통하며 소통이 원활한 편이다. 막상 수업 시간에 글을 읽거나 쓸 때는 어려워하며 짜증을 내기도 하고 한숨을 쉬며 마냥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 바깥에서 활동하는 시간에는 즐겁고 행복한 표정이다.

민들레 홀씨를 날리며 한참 놀다가 정원 꽃길을 걸었다. 등나무 아래에 이르자 벌이 윙윙 거리며 꽃 속을 드나들고,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등나무 넝쿨에 가득한 등나무꽃을 올려다보며 이야기하는 데, 갑자기 아이들이 보도블록 바닥에 쪼그려 앉아 뭔가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꿀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른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꿀벌 몇 마리가 눈에 띈 것이다. 장난기 많은 녀석이 정원으로 가 막대기를 찾아 들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다. 바닥에 있는 벌을 짓궂은 장난으로 괴롭힐 게 뻔했다. 나는 순발력 있게 한마디를 거들었다. "우리 이 벌들을 도와주자. 날아가다가 힘들어서 떨어졌나 봐. 어떻게 도와줄까?"

막대기를 들고 장난스레 웃으며 달려오던 카자흐스탄에서 온 녀석이 앞장을 섰다. 나무막대기를 벌에게 살며시 대자 꿀벌이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자 아이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꿀벌은 나무막대기를 꽉 잡았다. 아이는 벌이 떨어질세라 살며시 막대기를 들어 꿀벌을 영산홍꽃 속에 놓아주었다. 바닥에 있던 꿀벌을 모두 꽃 속에 돌려보낸 아이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보도블록 위만 쳐다보고 다녔다. 그러다가 개미집을 발견했고, 거미도 만날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보도블록만 보며 또 꿀벌을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눈부신 햇빛 아래 초록 이파리와 꽃들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정원을 돌아 나와 교실로 향하려는 데, 또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보도블록 사이에서 나온 지렁이가 햇볕에 말라 있는 모습을 아이들이 발견한 것이다. 서로 선생님을 부르며 시선은 지렁이를 향하고 있었다. 호기심천국의 아이들은 C자를 들어 들어 올리며 신이 났다. C자를 외치는 아이들의 표정이 얼마나 진지하고 맑은지…. 나는 하려던 말을 그냥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오려던 고정관념 속 부정적인 말들이 슬그머니 뒷걸음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전 중학교 교실에서 있었던 비슷한 일이 클로즈업되었다.

점심시간, 한 여학생의 손에 C자가 들려있었다. 순간 호기심 가득한 반 친구들이 C자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다가 지렁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함성을 지르며 흩어졌다. C자를 가지고 있는 아이는 자연스럽게 C자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손바닥에 올려놓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마른 지렁이를 만졌다. 얼굴을 찌푸린 아이들이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는 더 먼 곳에서 아이들의 모습을 보았었다.

자연을 닮은 아이들이 곁에 있어 줘서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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