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에게

2017.12.10 14:14:27

김희찬

아이들의 하늘 주비위 간사

'띠띠띠뛰~~~'

자정을 알리는 소리. 12월이다.

수영아!

오늘은 어제보다, 아니 어젯달보다 훨씬 춥다네. 율곡 이이와 생일이 같다던 너는 이 추위가 뭔지 잘 알거야. 또 감기가 시작되겠구나.

'리러 리러'를 입에 달고 다니던 형아를 쫓아 늘 떼쓰던 아기였는데.

2004년이었지. 배밀이만 하다가 벌떡 일어서 걷던 김수영. 나이만 다섯 살이던 너와 여섯 살 형아를 데리고 서울에 갔지. 교보문고에 들렀고, 글을 깨쳐 엄마가 사다주는 메이플스토리에 푹 빠져있던 형아는 아직 못본 신작을 잡고는 서점 바닥에 그냥 주저앉았지.

기지도 않고 벌떡 일어서 걷던 너는, 서울에서는 대부분 아빠 품에 안겨 다녔어. 아마도 형아가 지 책만 봤기 때문일거야. 인문학 코너를 오랜만에 둘러보던 아빠 등을 친 김수영. 낮게 "왜~"하고 물었더니, "아빠, 여기 김수영 있어~"라며 낮게 대답했지.

그랬지. 그때 EBS타큐에 여러 문인을 소개하며, 김수영도 소개된 뒤라 '김수영'이 제목에 있는 책 다섯 권을 네가 가리켰어. "아빠, 여기 김수영 있어~"라고 하며, 또다른 너를 그렇게 만났었어.

그런 애기 김수영이 이제 고3 막달이 되었구나.

몇 년 전에 시내 골목에 간판 하나가 새로 걸렸어.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가비찻집. '우리 아들 이름이 가비찻집 간판으로 걸려·'라며 잠시 생각했지만, 아빤 그게 수영이가 애기 때, "아빠, 여기 김수영 있어~" 했던 그 김수영인 줄 알고 있었지.

<풀>의 시인 김수영.

그를 위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낸 가비찻집인데, 작년에 처음 가보고, 올 해 두 번 가봤어. 그 주인이 하는 말, "여기 찾는 손님 대부분은 김수영을 보고 와요. 그런데 <풀>만 알고 오는 손님은 입구에 놓인 <김일성 만세>를 보고는 뭐라고 한마디씩 하고 나가 버려요."라고. 듣다보니, 아들 이름이라 궁금했던 엄마도 한번 다녀간 것 같더라.

지난 23일 수능날. 수능 안보는 수영이랑 늦은 점심을 할아버지와 같이 먹으며 주저리주저리 얘기했는데, 그 중에 아빠가 했던 말 기억하니· "아빠는 오늘 6.0 정도의 강진이 일어나길 바라고 있다"고 했던 얘기.

그게 먹은맘은 아니지만,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대학 진학을 두고 스무살의 삶을 옥죄는 이 세상이 아빠는 좀 미워. 천재지변에 결정한 조치는 반겼지만, 시험을 보다 지진 땜에 시험장을 나가는 학생은 수포자로 간주해 퇴실조치하겠다는 그 대안이 더욱 밉다.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이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수영이가 아빠 등을 두드리며, "아빠, 여기 김수영 있어~" 했던 그 시인이 <풀>을 눕혔을까· 바람이었을까· 봤을까 바람을· 생각했겠지. 고민했겠지. 풀보다 먼저 울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풀뿌리마저 눕혔을지 모르지만, 수영아. 답은 김수영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내고 이어가서 또 하나 풀을 보며 내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아빠가 수영이 나이였을 때가 30년 전이네.

입학 사흘 전, 할아버지께서 알려준 아빠 이름 석 자만 그리고 학교에 갔어. 학교 가서 한글을 배웠고, 아빠 글씨가 지독한 추상화라 글씨 잘 쓰는 여학생과 짝도 되어 보았지. 나중에는 펜글씨를 아빠 혼자 연습했었어. 하지만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30년이 지난 지금, 내 아이 김수영이 여전히 대입 앞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며 아빠는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리고 미안하다, 하염없이. 그 때보다 더한 대입이라는 벽이 내 아이들에게 다시 올 것을 알았으면서도, 아무것도 못한 아빠가 참 못났다.

날 춥다.

따숩게 입고 감기 조심해.

아빠가.

김수영에게.

P.S. <풀>의 시인 김수영과 김수영 시인의 <풀>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