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 이후

2017.11.26 15:26:59

박미선

용암중 교사

스러지지 못한 가을 풍경 위로 눈이 쌓였다. 입동이 벌써 지났으니 놀랄 일은 아니건만, 아직 남아 있는 나무의 붉은 잎에 내려앉는 흰 눈이 섣불리 세월을 재촉하는 것 같아 왠지 아쉽다. 시간은 이제 자꾸 안으로 생명의 기운을 모으는 침잠의 계절로 가고 있다. 저 나무는 겨울 지나 봄이 오면 다시 새잎을 품어 올려 청춘으로 회귀하겠지만, 사람의 일이야 그저 속절없이 늙어갈 뿐이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 심란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런 즈음에 자꾸 옛일을 생각하고 돌아가고 싶은 순간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나이 탓도 있겠다. 고인이 되신 분들이 문득문득 자꾸 생각나기도 한다. 가장 가까웠거나, 사랑했거나, 한두 번의 만남이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거나, 어이없이 일찍 가버린 사람들….

그 중에서도 오래 전 이맘때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임종 직전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나도 꽃상여를 탈 수 있을까?" 그 말씀에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죽음을 죽음으로 생각지 않으시는 듯하여 어쩐지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삶이 확장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도 읽혔다. 그리하여 돌아가신 이후에도 나의 삶을 지켜보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이미 결혼한 나이였는데도 집안 어른들은 할머니가 이승의 끈을 놓으려는 찰나에 나를 곁에 있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고집을 부려 기어코 마지막 순간을 본 나는 할머니 몸의 온기가 식으면서 그 표정과 기운이 홀연히 걷우어지던 것을 잊지 못한다. 몇 시간 후 할머니 얼굴은 생물의 박제에 드러난 그 느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혼을 놓아버린, 생의 물기가 빠져버린 얼굴에 나타난 그 적막을 나는 한동안 견디기 어려웠다. 할머니의 죽음보다 생이 떠난 할머니 얼굴에 드러났던 그 막막한 물질성이 오랫동안 괴로웠다. 생활의 희로애락이 일시에 멈추어버린 육신이 그처럼 낯설고 생경할 것으로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왜 어른들이 그토록 임종의 자리에 오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 깨달은 것은 그 광물적 육신으로 고인의 한 생애가 그냥 끝나는 것으로 알까봐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후 살아가면서 생전 할머니의 자애로운 표정· 웃음·말씀 등이 더욱 새록새록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마지막 소원대로 꽃상여를 타시고 한 생애를 보냈던 동네를 고샅고샅 누비셨다. 그리고 그 동네 야트막한 과수원 언덕에 잠들어 계신다. 그 언덕은 할머니와 어린 내가 씀바귀를 캐던 곳이다. 지난 볕 좋은 가을날 할머니 묘소에 잠시 앉아 있던 나는 내 삶이 할머니의 삶에 단순히 잇대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지지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런저런 일에 지칠 때면 이미 완결된 할머니의 생에서 다시 무한한 사랑과 말씀을 길어다 자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니 할머니 임종 시에 보았던 육신은 단지 비워졌을 뿐, 고인의 삶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을 떠올린다.

몇 백 년이 넘은 주목에는 죽은 부분이 살아 있는 부분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살아 있는 부분은 호흡량이 많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을 위해 지지조직을 죽은 부분에 맡기고, 나머지 부분은 광합성과 소통을 위한 필수조직만 유지한다고 한다. 높은 산의 주목은 대체로 죽음 위에 잎을 내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자연주의자 스코트 니어링은 100세가 되었을 때, 건강한 몸이었는데도 스스로 단식하여 삶을 멈추었다. 그의 결단은 다른 생명체에게 지상의 자리를 내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지난여름 들여놓은 감자 한 상자, 다 먹지 못한 감자에 싹이 무서운 기세로 손을 뻗친다. 떼어내도 생의 더듬이를 펼치듯 순식간에 번식한다. 잎 지고 눈 내리는 계절에도 생의 운동성은 변함이 없다. 어쩐지 미안한 마음으로 감자싹을 끊어내고 매끈해진 몸을 다듬어 따끈한 감자국을 끓인다. 나를 지렛대삼아 성장해갈 또 다른 생명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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