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 남산 아래까지 반란 소문이 퍼지다" 1728년 무신란①

2015.02.10 17:18:46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무신란(戊申亂)은 1728년(영조 4) 3월 15일 반란군이 우리고장 청주읍성(그림)을 유혈 점령하면서 발생했다. 《영조실록》은 하루 전인 3월 14일자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때 도하(都下)에 근거없는 풍문이 날로 흉흉하여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들고 서 있어 조석 사이도 보장할 수 없는 듯하였고, 남산(南山) 아래 일대에는 가족을 이끌고 피해 도망하는 사부(士夫)들이 많아서 나룻터에 길이 막혔으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함은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미 대규모 국가 반란이 있을 것이라는 풍문이 한양도성 안에 쫙 퍼진 모습이다. 이는 한양도성 안에도 무신 반란군과 내통하는 자가 많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같은 날짜 《영조실록》에는 '남산 아래에 사는 나라를 원망하는 많은 부류들은 그 역모를 서로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도 보이고 있다.

1728년 무신란의 주무대가 된 청주읍성. 조선후기 <해동지도>.

소론의 지지를 받고 보위에 오른 경종(景宗·1688~1724)이 재위 4년 게장을 먹은 후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급서했다. 그러자 노론의 후원을 받던 왕세제 연잉군(후에 영조·1694~1776)이 왕위에 오르면서 노론대 반노론(소론+남인)으로 정치 지형이 급변했다.

이에 반노론 세력은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전국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바로 무신란이다. 영남지역은 정희량과 조성좌, 호남은 박필현, 호서는 이인좌 정세윤, 경기는 권서린이 주도하여 병사를 동원했다.

여기에 평안병사 이사성은 관서에서 내려오기로 했고, 중앙에서 병권을 쥐고 있던 총술사 김중기. 금군별장 남태징, 전라감사 정사효, 담양부사 심유현 등이 호응했다. 청주 산동(낭성)의 신천영(申天永)은 계획 단계부터 반란에 가담한 것이 아닌, 청주읍성이 점령된 후에 참여했다.

그러나 반노론의 반란군 세력이 당시 영조 정부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품게 된 배경은 정치지형 급변 외에 개인적인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 우리고장 청주목 송면(지금의 괴산 청천)에 기거하고 있던 이인좌(李麟佐·?-1721)는 관찰사 출신 이운징(李雲徵)이 그의 조부가 되고, 또 남인계열인 윤휴(1617-1680)의 손자 사위가 되는 등 명문가 사족이었다.

그러나 유학 신분이던 이인좌는 1726년 1월 경기도 지역의 과거장에 무단으로 들어간 죄로 전라도 부안으로 유배됐다. 당시 이인좌는 조부 이운징이 1694년 갑술환국으로 귀양간 일로과거를 볼 수 없는 폐고 상태에 있었다.

박필현(朴弼顯·1680-1728)은 형조좌랑에서 1727년 12월 태인현감으로 좌천됐다. 1721년(경종1) 이른바 신축소(辛丑疏) 사건 때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을 탄핵·사사하게 한 것에 대해 노론들이 보복한 결과였다.

신천영의 산동신씨는 연산군 무렵에 우리고장 낭성과 가덕으로 낙향해 대과급제 24명, 진사 80명을 배출하는 등 청주지역 명가였다.

그러나 남인 집안인 신천영은 그의 할아버지 신경제가 경종대 반송시열 우두머리로 활약하다 귀양가면서 몰락했다. 무신란에 반송시열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 사건을 보는 또 다른 포인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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