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충북 백두대간, "곰이 많이 살았다"

2015.01.29 17:01:46

조혁연 대기자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여자로 변한 곰인 웅인(熊人)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금강수계에 위치한 공주 곰나루(熊津)에도 비슷한 내용의 전설이 존재한다. 먼 옛날 공주 연미산 아래에 암곰이 살았고, 성장해서는 시집을 가고 싶어했다.

어느날 어부가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오는 것을 보고 곰이 다가갔다. 이때 어부가 두려움 때문에 기절하자 동굴로 업고 와 극진히 간호했다. 그후 어부는 곰기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으며 탈출을 궁리했으나 곰이 동굴 입구를 큰 돌로 막고 나가므로 할 수 없이 곰과 살게 됐다.

마침내 곰이 잉태하여 새끼를 낳자 어부는 곰을 돌봐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곰이 방심을 했고 어부는 탈출에 성공했다. 어부가 없어진 것을 안 곰은 강가에서 되돌아올 것을 애걸했으나 어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화가 난 곰은 새끼를 죽이고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

그 뒤부터는 금강에 풍랑이 자주 일어 나룻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빈발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위령제를 지내자 나룻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지리산에 방사된 곰 모습

단군신화와 곰나루 전설은 세부 전개는 다르지만, 곰과 인간이 결합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서 큰 얼개는 같다. 사학자들은 이를 역사적 사건이 신화로 상징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즉 곰은 토착족, 어부는 외부에서 유입된 외래족으로 본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가정하에 백제(외래족)가 마한(토착족)을 멸망시킨 사건, 혹은 백제가 한성을 잃고 웅진(공주)로 천도한 것을 상징하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곰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우리 민족과 친숙한 면이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 자생하던 곰은 이미 오래 전에 멸종됐고, 따라서 지금은 지리산 일대에서 인공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곰은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개체수가 매우 많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사》지에는 '그 나머지 완호물(玩好物)인 곰, 범, 표범 가죽 같은 것은 백성을 괴롭혀 징취하여 가만히 진상하지 못하게 하고…'라는 표현이 보인다. 완호물은 매우 좋아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 폭군 연산군은 궁궐 정원에 곰을 풀어놓고 이를 사냥하는 놀이를 매우 즐겼다. 그 과정에서 산간지역 백성들이 곰을 생포해 공급하느라 커다란 고역을 치뤘다.

'비록 향교의 유생이나 사찰의 중들일지라도 모두 몰이꾼으로 채우매, 혹 부인이 남복(男服)을 하고서 군오(軍伍)에 따르는 자도 있었다. 그리하여 어깨에 산 곰·범을 메고 오는 자가 길에 잇달았다. 경기·충청·황해·강원 4도가 어수선하고 백성이 고달파, 거의 다 흩어져 달아났다.'-<연산군일기 11년 3월 17일자>

인용문 중 충청도에서 곰이 살만한 곳은 충북의 동쪽인 백두대간 일대가 거의 유일하다. 《정조실록》7년 9월 5일자의 '훈련 도감에서 곰을 사냥하였음을 들어 아뢰니, 비답하기를, "원주와 횡성 경계와 제천(堤川)과 영동(永同) 지경에는 요사이 듣건대 곰이 나오는 근심이 아주 심하다고 하기에…'라는 내용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이밖에 《세종실록》지리지는 단양군에서는 곰쓸개, 연풍·제천·영춘현에서는 곰털이 많이 난다고 기록했다. 하나같이 충북 백두대간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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