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 벼루 주문연과 청원북이 최명길

2015.01.22 15:12:02

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로 홍문관이 있고, 그 수장은 정2품의 대제학(大提學)이었다. 이런 대제학들 사이에는 '주문연'(主文硯)이라는 벼루를 주고 받는 아름다운 전통이 존재했다. 굳이 벼루를 주고 받은 것은 대제학이 '문'(文)을 총괄하는 최고의 벼슬자리였기 때문이다. 《증보문헌비고》 권221 직관고는 주문연과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주문연은 남곤(南袞)으로부터 이행(李荇)에게 전해진 뒤 서로 전해 내려오다가 이덕형(李德馨)에 이르러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 그런데 명(明)나라 군대가 이를 얻어서 가져다가 단지를 괴는 돌로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이 보고서 도로 가져와 홍문관(弘文館)에 둠으로써 다시 전해지게 되어 이이첨(李爾瞻)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은 '이이첨이 패(敗)하게 되자 다시 잃어버렸는데, 신흠(申欽)이 대제학으로 있을 적에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으로 다시 큰 벼루 하나를 만들어 '전심연(傳心硯)'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 남아 전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대한제국기인 1903~1908년 사이에 고종황제의 칙명(勅命)으로 편찬된 2백50권 분량의 책이다. 따라서 주문연은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이이첨이 대제학으로 있을 때 다시 실종되는 등 곡절이 있었으나 대한제국기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벼루.

ⓒ자료: 국립고궁박물관
선임 대제학이 후임에게 벼루 주문연을 전달할 때는 달랑 벼루만 전한 것은 아니었고, 선정을 베풀라는 뜻으로 시(詩)도 함께 전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것과 관련해 주문연 시를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은 우리고장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잠들어 있는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다.

최명길의 선임 대제학은 장유(張維·1587~1638)였고, 후임 대제학은 대신 홍서봉(洪瑞鳳·1572∼1645)이었다. 먼저 장유가 최명길에게 주문연을 주면서 다음과 같은 한시도 동봉했다.

'/…/ 선배들 보기 부끄럽게 두 번이나 맹주(盟主) 노릇 / 명장(名匠)이 옆에서 보고 졸장(拙匠) 비웃었으니 / 지금부턴 우리 문단 정채를 더하리라 / 삭방의 사령관 적임자를 얻었으니.'-<계곡선생집 제 31권>

'두번이나 맹주 노릇'했다는 것은 저자인 장유가 대제학을 두번 역임했다는 뜻이고, '삭방의 사령관 적임자'는 후임자 최명길을 지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최명길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마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법도는 오래된 맑은 풍속이니 / 사람과 기물은 맞지 않으나 일은 절로 같구나. / 채필을 누가 상림원에 추대하였나 / 묵지에는 자줏빛 물결 헛되이 움직이네./…/.'-<증보역주 지천선생집 3권>

후배 대제학으로서 선배에게 겸양의 예를 갖추고 있다. 그의 후임은 앞서 서술한대로 대신 홍서봉이었다. 최명길은 전통대로 그에게도 주문연을 전달하며 한시도 동봉했다.

'/…/ 제맹을 삼년이나 주관하여 부끄럽더니 / 종장을 대가에게 미루었도다. / 나는 계곡을 대신하고 공은 나를 대신하니 / 문단에서 늙은 수장이 더욱 왕성하리라.'-<〃> 인용문 중 계곡은 선배 대제학 장유, 공은 홍서봉을 일컫는다. 참고로 조선시대 진천에는 상산벼루가 무척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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