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두컴컴한 곳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기 위해선 빛이 필요하다. 빛이 물체의 표면에 부딪히고, 반사되어 우리의 눈에 들어오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본다. 우리는 빛을 통해 바라보는 물체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만으로 무언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우리 일상에서 본다는 것은 대부분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고, 눈꺼풀이 감기기 전까지 눈동자가 수행하는 일련의 수동적인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원자, 전자와 같은 극소한 크기의 입자들이 움직이는 미시세계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세계와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된다. 이 물질들은 너무나도 작아서 우리가 그것을 관측하려는 시도만 해도 입자의 표면에 부딪히는 빛의 간섭으로 인해 바로 흩어져 버린다.
미시세계에서는 본다는 것 자체가 물질을 변하게 하는 능동적인 행위인 것이며, 따라서 보려고 하는 것을 정확하게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기초를 이루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다. 우리의 관찰이 도리어 본래의 모습을 바꿔버리기에, 우리는 이 작고 민감한 세계의 모든 것을 완벽히 통제하거나 알 수 없다.
이렇듯 당연하지만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미시세계의 물리학적 현상이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꽤 비슷하다는 상상을 해봤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거시세계에서 우리는 당연한 사회적 행동을 한다. 정시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점심 식사를 하고, 일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잠이 든다.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고,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것을 의심하며 수행하지 않는 것처럼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 즉 개개인의 안에 있는 미시세계는 심지어 그 자신마저도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우주이다. 개인이 그 안에 품고 있을 마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고, 희로애락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수만 가지의 감정들은 겉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그 안에서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 모호함으로 인해 우리는 인간관계에 있어 때로는 타인이 품고 있을 마음에 대해 지나치게 확신하는 경향을 가지거나, 상대를 알아가려는 수 차례의 시도 끝에 결국 나는 타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 중 하나를 내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일상의 거시세계에서 느끼는 당연함을 개인의 미시세계에 섣불리 적용했을 때 나타나는 오류인 것이다.
그럼 타인의 마음을 알고자,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미시세계의 전자를 관측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이 미시세계를 탐구할 때는 관찰자의 관측행위 자체가 관찰 대상을 교란시키기에 정확한 관측이 어렵다.
마음의 미시세계에서도 타인의 마음을 관측하는 방법에 따라 그 결과는 매번 달라질 것이며, 이미 정해진 결정값이란 없을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행위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상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수록 상대는 내게 바뀌어 보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관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