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목사 김재로는 다른 고을의 수령과 달랐다

1728년 무신란

2015.05.12 13:11:54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충북지역 현감들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국록을 먹고 있는 관료의 입장에서 반군을 적극적으로 진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함은 물론 일부는 반군에 협조했다.

당시 회인현감 김도응, 황간현감 이정휘, 진천현감 임상극, 청안현감 이정열, 보은현감 조문보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당연히 영조는 이들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따라서 '失臣節也'(신하의 절조를 잃었다)라며 처형을 명령했다.

'군문에서 회인의 전 현감 김도응(金道應)과 황간의 전 현감 이정휘(李挺徽)를 효시케 하라고 명하였으니, 도적의 관문(關文)을 도부(到付)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잃었기 때문이다.'-<영조실록 4년 4월 6일자>

인용문 중 '도부'는 관찰사가 수령의 보고에 대하여 답하는 공문을 말한다. 따라서 '도적의 관문을 도부하였다'라는 인용문의 표현은 반란군의 수괴 이인좌가 내려보낸 공문을 김도응, 이정휘 등 당시 두 고을 현감들이 접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이인좌 반란군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따라서 영조는 '失臣節也'라는 말로 이 부분을 문제삼았다.

《영조실록》에는 충주지역 반란 인물로 전회에 소개한 민원보 외에 민백효(閔百孝), 민백효의 종 말종(末從), 만재(萬才), 춘흥(春興), 순봉(順奉), 미상의 종 성적(成績), 이조겸(李祖謙), 한대명(韓大命), 민성효(閔性孝), 민경효(閔景孝), 민원해(閔元楷), 조백(趙柏)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민씨 등의 이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것은 숙종대 환국의 피해자인 민암, 민희 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환국이 연이어 발생하자 당색이 남인인 이들 후손들이 대거 충주목 일대로 입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서울에 올라가 포수 10여명을 포섭하고 △데려온 이들을 꿩사냥을 가장해 실전훈련을 시켰으며 △또 민원보의 집에 조총(鳥銃) 20여 자루, 환도(環刀) 10여 자루, 철편(鐵鞭) 20여 자루를 비치하는 방법으로 반란을 준비했다. 그리고 거느리고 있는 종들에게 관인을 보면 살상할 것을 명령했다.

김재로의 초상화

"조총(鳥銃)을 주며 말하기를, 「이 고을의 하인들과 대소 관인(大小官人)을 막론하고 불시에 들어오는 자는 다 쏘아 죽이라.」 하고 밤낮으로 큰 사랑에서 지키게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영조실록 4년 5월 10일자>

"종에게 조총을 주며 말하기를, 「근래 충주·괴산 등에 내려온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많이 있으니, 네가 중도에서 쏘아 죽이면 후히 상주겠다.」하므로…."-<〃>

당시 충주목사 김재로(金在魯·1682-1759)는 앞서 열거한 인물과는 달랐다. 호서안무사도 겸하고 있던 그는 반란군이 행동에 들어가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들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현장에서 효시했다.

'호서안무사 김재로가 장계하기를, "역적 위천총(僞千摠) 조백(趙柏) 등을 잡아 효시하였습니다.'-<영조실록 4년 5월 7일자> 이는 그의 당색이 철저한 노론이었기 때문에 가능했고,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朴文秀·1691-1756)도 결국 그에 의해 파직당했다. 1760년 영조는 그가 죽자 직접 상가를 찾아 문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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