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태봉산에 민묘를 썼다가, 일제 부강 갑부

1728년 무신란

2015.04.28 16:19:12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영조태실 터(청주시 낭성면 무성리)의 소유권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불하로 지난 1930년대 민간인에게 이전됐다는 설을 제기한 사람은 현재 고인쇄박물관이 근무하고 있는 이규상 씨다. 그는 지난 2005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한국의 태실≫(청원군·청원문화원 간)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이 책 민담편에 의하면 영조 태실터는 청원 부강의 한 부호에 의해 매입됐고, 그는 일대의 만석꾼으로 이름난 김학현이었다. 그는 연기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금강에서 소금배를 운영하며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선친의 묘자리를 좋은 자리에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또 대대손손 후광을 얻는다는 속신을 믿고 영조 태실터를 매입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이 상여가 들어오던 날 힘을 합쳐 저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자 김학현은 건장한 남자 50명을 상여꾼으로 사서 무성리 마을로 돌아왔고, 결국 영조 태실터가 있는 태봉산 정상에 일반인 묘가 들어서게 됐다.

낭성면 성모재 모습.

이후 김학현은 마을 주민들이 조부모 묘를 파묘할 것을 걱정, 성모재(誠慕齋)라는 건물을 건립했다. 재실은 평지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재실 용도를 겸한 성모재는 고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마을주민들의 동태를 살피려는 의도도 함께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고 있는 성모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용마루에 멧돼지 모양의 잡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풍벽에는 흰 바탕 위에 포도 무늬가 새겨져 있다. 풍벽은 달리 바람벽(風壁)이라고 한다.

민묘가 들어선 후 마을 주민들은 영조 가봉비(加封碑)를 마을로 옮겨 보호했다. 반대로 김학현의 집안에서는 불행이 꼬리를 물었다. 그의 친아들은 6.25 때 보도연맹으로 몰려 사망했고, 손자는 아들 없이 딸만 두면서 절손이 됐다.

이때 한 역술인인 "왕실의 태에 치욕을 줬기 때문"이라고 귀뜸했고, 손자되는 사람은 영조 태봉산 정상에 있던 조상묘를 다른 곳으로 옮긴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따라서 현재 태봉산 정상은 주인없이 비어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부강의 갑부였던 김학현 씨의 생전 행적은 당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는 갑부답게 기부도 많이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부강】 충북 청주군 부용면 유지 제씨는 한재 이래 기근에 헤매는 동포에게 아래와 같은 동정금을 주었다고 한다. 김학연 1백20원, 김원복·전서봉·우덕삼·곽흥원·이태현·박노태 각 30원. 소계 4백원.'-<동아일보 1930년 3월 2일자>

인용문을 보면 김학현 씨가 전체 기부자 7명 중 액수가 가장 크다. 이같은 모습은 다음 기사로도 이어져, 그가 또다시 기부액 전체 1위를 차지한다. 이때가 김학현 씨의 인생 전성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강】 충북 청주군 부용면 부강공립보통학교 학부형회에서는 지난 17일 추기 대운동 끝에 간부 제씨의 발기로 다음가 같은 거액을 각각 연출하여 기본금을 만드는 동시에 사백여명 학부형들도 다소 낼터이라고 한다. ▲김학현 1천1백원 ▲전서봉 1천원 ▲확흥원 2백원 ▲윤성길 1백원 ▲계2천3백30원.'-<동아일보 1930년 10월 23일자>

지금은 사라졌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운동회 때 기부금을 받았고, 그 기부금 명단을 금줄의 고추처럼 천막 밑으로 내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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