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낭성의 영조태실, 왜 5년후에야 가봉됐나

2015.04.21 15:51:53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조선시대에는 왕자가 태어나면 그 태를 깨끗이 씻은 후 항아리에 봉안하고 기름종이와 파란 명주로 봉하였다. 그리고 붉은색 끈으로 밀봉한 후 항아리를 다시 큰 항아리에 담았다. 이어 태실 장소가 정해지면 안태사(安胎使)를 보내 묻게 했다. 이렇듯 조선왕실은 왕자의 태를 무척 소중하게 여겼고, 그것은 태장경(胎藏經)의 영향을 받은 바가 컸다.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賢愚)와 성쇠가 모두 태에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자 않을 수가 없다. (…) 남자가 만약 좋은 땅을 만난다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九經에 정통하며, 단상(團爽)하여 병이 없으며, 관직이 높은 곳에 승징되는 것이다."

인용문 중 '구경'은 주역, 시전, 서전, 예기, 춘추, 효경, 논어, 맹자, 주례 등 9가지 경전, '단상'은 얼굴이 시원스럽게 생긴 것을 말한다. 왕실이 왕자의 태를 반드시 명당 자리에 묻으려 한 것은 무병장수 기원 외에 명당을 선점,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 태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르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청주시 낭성면 무성리의 영조 태봉의 모습

충북에는 경종 태실(충주시 엄정면), 영조 태실(청주시 낭성면), 순조 태실(보은군 속리산면) 등 3개 국왕태실이 존재하고 있다. 이중 영조의 태실은 출생 이듬해인 숙종 21년(1695년)에 지금의 청주시 낭성면 무성리 뒷산에 조성됐다.

그리고 보통의 경우 왕자가 보위에 오르면 태실을 태봉(胎封)으로 격상시키고 주위 석물을 추가로 배치하는 것이 관례였고, 이를 가봉(加封)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영조의 청주 낭성면의 태실은 즉위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1729년에야 가봉됐다. 이유는 1728년의 무신란과 극심한 가뭄때문 이었다.

특히 영조는 무신란의 중심지가 자신의 태가 묻혀있는 청주목이라는 점에서 가슴이 더욱 아팠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영조는 자신의 태봉을 매우 검소하게 조성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은 영조와 당시 예조판서 김시환(金始煥·1673-1739)이 주고받는 내용으로, 《영조실록》 5년 8월 29일자이다.

김시환: "청주에 있는 태봉의 석물(石物)은 조금 체제(體制)를 감해서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마는, 감하기가 미안합니다."

영조: "선왕조에서 후릉(厚陵)의 석물 제도가 참으로 좋았기 때문에 특별히 이를 모방하여 법제로 삼도록 명하였으나, 석물의 체중(體重)도 오히려 감하여 작게 하였다. 하물며 태실(胎室)을 표시하는 것이겠는가. 석물의 체중이 크거나 작은 것이 어찌 사체에 관계가 있겠는가. 일 3분의 1을 감한다면 운반해 가기도 조금 나을 것이다. 또한 이번에 이미 감한다면, 뒷날에 마땅히 이를 정식(定式)으로 삼아 준행할 것이니, 오늘날의 민폐(民弊)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뒷날의 폐해를 제거하는 방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영조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고, 청주 낭성면 무성리 태봉은 다른 것과 달리 소박하면서 비교적 작게 세워졌다. 이후 영조의 태실은 1928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항아리만 꺼내어 서울 창경궁으로 옮기면서 크게 파손되었다. 그런 것을 청원군이 지난 1982년 《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를 바탕으로 석물을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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