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이 '서원'에서 슬픔에 잠긴 이유는

1728년 무신란

2015.04.16 13:17:51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 영장(營將)이었던 남연년(南延年·1653~1728)은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천복동(天卜洞)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따라서 인근에는 초록바위, 맹골, 곰 이야기 등 구전이 많이 남아 있다.

구전에 의하면 노래기 중말 동쪽에 있는 초록바위는 남연년이 어릴적에 무예를 닦던 곳이다. 또 남연년이 부친을 여의고 맹골 묘에서 아우 남극년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고 있을 때 매일 범이 찾아와 벗이 돼 주었다.

이밖에 남연년이 황해도 병마우후로 있을 때 곰(熊)이 고향 마을에 들어와 사람을 해쳤다. 그러자 그가 단기(單騎)로 고향으로 돌아와 곰을 화살로 잡아 그 가죽으로 상자를 만들었다는 구전이 존재하고 있다.

남년연에 대한 이같은 구전은 영조대의 현양사업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일부는 사료에 바탕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김원행(金元行·1702-1772)이 있고, 그의 문집으로 《미호집》(渼湖集)이 존재한다.

그는 《미호집》 제 20권에서 남연년에 대해 △'부모를 섬길 때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명성이 났다' △'곰을 퇴치한 일로 군영의 장졸들이 공의 용맹함에 감복하였다' △'공이 적들에게 사로잡혀 '관덕당'(觀德堂)으로 끌려가 이른 새벽에 살해됐다'라고 적었다.

《미호집》의 기술이 사실이라면 남연년은 '관덕당'에서 살해된 것이 된다. 그리고 《영조실록》에는 반란군 이배(李培)라는 인물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두 자료를 조합하면 무신란 당시의 남연년은 1728년 이배에 의해 청주읍성내 관덕당이라는 곳에서 살해됐다.

그러나 《여지도서》 청주목 공해조에는 '관덕당'이라는 건물명이 보이지 않아, 추가 고증은 필요하다. 현재 남연년는 고향인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가 아닌,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에서 영면하고 있다.

남연년의 묘는 고향 음성군 원남이 아닌, 진천 백곡에 위치한다.

고향과 묘가 다른 것에서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진천 백곡면에서는 의령(宜寧) 남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고, 따라서 그 과정에서 묘지가 진천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청주를 지나가다가 남연년의 충절를 추모하는 '서원에서 슬픔에 잠겨'[悲西原]라는 한시를 남겼다. 운문이지만 다산의 시는 객관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속에는 '언중유골'이 있다.

'청주 성곽 동쪽에 숲 나무 울창한데 / 적병이 한밤중에 잠복을 하였다네 / 도적떼는 못가에서 칼날 갈고 있을 때 / 원수의 감영에는 풍류 소리 요란하다 / 곤드레 술에 취해 고운 기생 옆에 끼고 / 아문에 칼날 미쳐도 나른하여 못 일어나 / 상여에다 무기 실은 계책 본디 우매하니 / 대숲에다 피를 뿌린 공로 어찌 우대하리 / 단청한 옛 사당이 우뚝하게 드높은데 / 철 따라 향화 올려 정성껏 예를 행하네 / 하북 땅에 어찌 일찍이 의사가 있었던가 / 절개를 다한 이는 남연년 하나일 뿐'-<다산시문집 제1권>

'원수의 감영에는 풍류 소리 요란하다 / 곤드레 술에 취해 고운 기생 옆에 끼고'라는 표현은 그날 밤 충청병영의 분위기를 지칭한 것이다. 다산은 이런 의도 끝에 '하북 땅에 어찌 일찍이 의사가 있었던가 / 절개를 다한 이는 남연년 하나일 뿐'이라고 시문을 대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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