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읍성 희생자 유족 즉각 보상·위로하다, 영조의 심리전

1728년 무신란

2015.04.09 15:26:00

조혁연대기자

[충북일보] 영조는 이봉상, 남연년, 홍림 등의 1728년 무신란 희생자 유족에 대해 마치 속도전을 벌이듯 '보상과 위로'에 나섰다. 이는 역적은 가차없는 응징을 하고, 충신은 국가가 보훈한다는 의도였다.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에게 가자(加資)하기를 명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을 기복시켜 일체로 승품하고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호하여 군영으로 나가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영조실록 4년 3월 20일자>

그러나 3월 20일은 1728년 무신란이 발발한지 닷새밖에 되지 않고, 또 반란의 수괴 이인좌가 아직 체포되지 않은 때이다. 그럼에도 영조가 아직 반란의 구름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청주읍성 희생자의 아들을 승품한 것은 고도의 심리전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

이인좌는 장항령 일대의 전투에서 체포됐다. <대동여지도> 부분.

이인좌는 3월 24일 경기도 안성 장항령(獐項嶺·사진)·죽산 일대에서 체포됐고, 그로부터 7일후 군기시 앞에서 처형됐다. 영조는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에는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궁궐로 초청해 위로를 하기도 했다.

'충신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를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아버지가 순국, 효충하여 대절(大節)을 높이 세웠음을 내가 매우 가상히 여겨 감탄하고 있으나, 당일의 일을 상상해보면 이루 슬픔을 말할 수 있겠는가? 절의를 숭장(崇奬)하는 것은 세상을 격려하여 무딘 것을 날카롭게 하는 일이다." 하고, 초모(貂帽) 하나를 특별히 내려 주었다.'-<영조실록 6년 12월 16일자>

인용문 중 초모는 담비로 만든 모자로, 임금의 주된 하사품의 하나였다. 영조의 무신란 청주읍성 유족에 대한 배려는 그들의 아내, 어머니에게로도 이어졌다. 먼저 홍림 노모의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당시 암행어사 "박문수가 홍임의 어머니는 금년 나이 80세로 의지할 곳 없다"고 복명하자 영조는 "월름의 일은 사체가 어떠할지 알 수 없으니, 해조(該曹)에 분부하여 사시(四時)로 구휼케 하라"(영조실록 6년 12월 20일자)라고 하명했다.

인용문 중 월름은 곡식으로 주는 월급으로, 영조는 월름과 비슷한 효과를 갖는 사시사철 구휼을 명령했다. 이밖에 남연년의 처가 사망하자 직접 염습과 장례물품 부조를 명했다. 이는 영조가 삼충신을 어느 정도 배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 충신 남연년의 처에게 염습하고 장례를 치를 물품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는데, 영의정 홍치중(洪致中)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영조실록 8년 4월 11일자>

지금까지의 진행을 보면 영조는 관품이 높았던 이봉상보다는 남연년을 더 배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인용문 안에 그 답이 있다.

"충민공 이봉상은 찬성(贊成)을 추증하고, 남연년은 병조 판서를 추증하는 데에 그쳤다. 충민공은 비록 잠잘 무렵에 해를 당했다고 하더라도, 남연년이 세운 절개는 옛날 당나라 안녹산(安祿山) 난리 때의 장순(張巡)에게 양보하지 못할 정도이니, 추증하는 관직이 비록 찬성보다 지나치더라도 옳다."-<영조실록 37년 6월 29일자>

영조의 이같은 인식은 이봉상은 잠을 자다가 반란군에게 살해당했고, 남연년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인좌를 꾸짖다가 살해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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