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성을 버렸음에도 목숨보전, 청주목사 박당

1728년 무신란

2015.03.26 15:17:04

조혁연대기자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충주, 청주, 공주, 홍주(지금의 홍성) 등 4개 목(牧)이 존재했다. 조선왕조는 이 4개 목을 충청도의 계수관으로 활용해 이른바 강등 지명을 만들었다. 가령 우리고장 충주에서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충청도'에서 '충' 짜를 빼고 '공청도'나 '홍청도' 등으로 작명했다.

목사에게는 정3품의 관품이 주어졌다. 충청도관찰사가 종2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낮지 않은 벼슬이다. 따라서 목사에게는 '당상관'의 예우가 주어졌다. 당상관은 직역하면 마루 위라는 뜻으로, 임금과 같은 마루 공간에서 국사를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밑은 당하관이다.

1728년 무신란 당시 청주목사는 박당(朴金+堂)이라는 인물이었다. 문집을 포함한 현존하는 사료에는 그에 대한 인물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면 《경종실록》을 보면 그가 청주목사로 부임하기 전에 임천군수를 역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는 1728년 3월 15일 이인좌 반란군이 청주읍성 성문을 돌파할 당시 취침 중에 있다가 관노의 고함을 듣고 처자, 인부(印符) 등을 버리고 담장을 넘어 탈출했다.

'처음에 박당이 잠을 자고 있던 중 급창(及唱)이 적이 이르렀다고 고하자 사방에서 함성이 일어나 놀라 어쩔 줄을 모르고 인부와 처자를 버리고 몸을 빼내어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해 지경 내에 있는 절간에 이르렀다.'-<영조실록 4년 3월 19일자>

인용문의 급창은 관노의 일종이고, 인부는 청주목사의 관인(官印)과 청주목의 명부(名符)로 위정자면 어떤 경우든 사수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가 탈출해 도망한 곳이 지금의 어느 사찰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지경 내에 있는 절간'이라는 표현으로 미뤄 우암산 일대로 추정된다.

절간으로 숨어든 박당은 그 즉시 운유거사(雲遊居士)로 이름을 바꾸고 옷을 승복으로 갈아 입은 후 스님의 무리 안에 슴었다. 그는 의병장 박민웅(朴敏雄)이 상당산성을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좀처럼 절간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청주목사 박당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오명항이었다.

'그의 처자가 하룻밤을 자고 난 후 간신히 뒤좇아 왔는데, 혹 발자취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짧은 옷과 평량자 차림으로 운유거사라고 청탁하면서 승려들 가운데 섞여 있었다. 의병장 박민웅이 적을 평정했다고 보고하고 고을 일을 다스리기를 청했지만 깊이 숨고 나오지 않다가 힘껏 청하자 비로소 나왔으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분개했다.'-<영조실록 3월 19일자>

당시 살벌했던 분위기로 볼 때, 청주목사 박당은 즉시 목숨을 잃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박당은 이듬해 능주목사로 부임했다.그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소론계 출신의 당시 영의정 오명항(吳命恒·1673-1728·그림)이었다.

'금일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 우의정 오명항이 아뢰기를

"신이 청주에 도착했을 때 듣건대 목사 박당은 끝내 경내를 떠나지 않고 군병을 불러모아 적의 추격을 받아 겨우 살아났으며, 평정한 후에 일처리를 합당하게 하고 재물과 곡식 역시 많이 추심하여 백성들이 유임시켜주기를 원하고 있었으니, 그가 잘 다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비변사등록 영조 4년 7월 16일자>

같은 사건, 같은 인물을 두고 《영조실록》과 《비변사등록》에는 정반대의 내용이 실렸다. 추정이지만 오명항과 마찬가지로 박당도 소론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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