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문만 달랑 1장 보낸 결과는, 충청감사 권첨

 1728년 무신란

2015.03.24 14:08:37

조혁연 대기자

[충북일보] 1728년 무신란 당시의 충청도관찰사는 권첨(權詹·1664-1730)이었다. 그는 안동이 본관으로, 조선 관료사회에서 외직의 꽃인 관찰사에 거푸 역임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는 1724년 전라도관찰사, 1727년 충청도관찰사에 역임됐다.

'권첨을 충청감사로 삼았다. 권첨과 정사효(鄭思孝)는 다 이광좌(李光佐)가 천거하였다.'-<영조실록 3년 8월 5일자>

인용문에 권첨과 정사효의 이름이 함께 거론된 것은 얄궂은 운명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무신란 당시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 권첨은 전술한대로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둘의 우유부단함이 공통적으로 문제가 됐다.

당시 박필현이 전주읍성을 공격할 때 처음의 밀약과 달리, 마음이 변해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인물이 바로 정사효이다.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사전에 밀약이 있었던 점은 향후 신문과정에서 엄청난 죄값으로 작용했다.

권첨은 앞서 밝힌대로 1827년 8월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그 즉시기 아닌, 해를 넘겨 부임했다. 그것도 교구(交龜)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인좌 반란군에게 충청감영 관할인 청주읍성을 점령당했다.

무신란 당시 공주목에 위치했던 충청감영 모습. 조선후기 지도 <지승>.

교구는 신구 관찰사가 직인을 교환한다는 뜻으로, 해당 직인이 거북이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같은 명칭이 생겨났다. 교구의 교환은 충청도는 진천 광혜원, 경상도는 문경 새재 등 주로 도경계 초입에서 이뤄졌다.

신임 충청도관찰사 권첨은 이같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신란이 발발하자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았거나 못했다. 대신 그는 추후 신문에서 "충청병영이 있는 청주읍성으로 공문만을 보냈다"고 진술했다.

당시 충청도관찰사의 집무처인 충청감영은 공주에 위치하고 있었다. 결국 권첨은 반란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죄목으로 절도충군(節島充軍)됐다. 신분이 지방장관에서 일개 사병으로 강등돼 국경 오지로 유배됐다는 뜻이다.

'처음에 권첨(權詹)이 막 방백이 갈리어 미처 교귀 하기 전에 청주(淸州)에서 도적이 일어났는데, 연기현감 임상태(林象台)가 흉격을 보고 영문으로 달려가 고하자, 권첨이 새 방백을 기다리게 하고 조치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각 고을이 즉시 군사를 내어 도적을 치지 못하게 되어 적세(賊勢)가 더욱 치성하였던 것이니….-<영조실록 4년 4월 2일자>

권첨에 대한 영조의 치죄는 절도충군으로 마무리되는 뜻했다. 그러나 무신란 가담자 또 다른 인물을 신문할 때 '권첨'의 이름이 나오면서 그는 극변에서 한성 국문장으로 다시 끌려나와야 했다. 영조는 더이상 노론계 인물인 권첨을 비호하지 않았다. 다음은 ≪영조실록≫ 6년(1730) 5월 1일자에 기록된 영조와 권첨의 대화 내용이다.

영조: "무신년에 일어난 청주(淸州) 역적의 형세가 어떠하였기에 네가 머뭇거리며 출병(出兵)하지 않았느냐."

권첨: "영장(청주읍성의 남영년 지칭)에게 공문(公文)을 보냈습니다."

영조: "이때가 어찌 공문만을 보낼 때이겠는가. 가령 이웃집에 도둑이 들어왔더라도 서로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제멋대로 도둑질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느냐."

권첨: "머뭇거리며 관망한 죄는 이의없이 자복하오며…."

권첨은 그로부터 나흘후 물고(사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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