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은 왜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나

1728년 무신란

2015.03.05 10:50:24

조혁연 대기자

이인좌 등 반노론 세력은 무신년(1728년)에 정변을 일으켰지만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거사에 성공할 경우 밀풍 군 탄(坦·?∼1729)으로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굳이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데는 나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 밀풍군의 할아버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인조의 장남)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 회(檜)다.

광해군(光海君·1575~1641)은 북인의 지원을 받아 보위에 올랐으나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협력한 인조반종에 의해 실각, 제주도로 유배를 간 끝에 사망했다.

당시 서인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광해군의 폐모살제, 즉 계모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증살(방에 불을 때어 죽임)한 점이었다. 바로 이 부분에 방점이 찍힌다.

인조반정이 일어날 때는 노론과 소론이 분당하기 전으로, 동당(同黨)인 서인이었다. 남인들도 협력자 위치이기는 했으나 신권력 창출에 협력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무신난을 일으킬 당시 반노론 세력들에게는 그런 권력에의 향수가 있었다. 이들은 거사 직전 밀풍군을 찾아가 의사타진을 했던 것으로 실록은 기록했다. 이인좌는 관군에 체포 된 후의 신문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이유익·한세홍이 항상 밀풍군이 인망(人望)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유익이 가서 보고 말하였더니, 밀풍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영조실록 4년 3월 26일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봉건주의 왕조시대에는 불충이자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볼온사상'(不穩思想)이었다. 실록 또 다른 기록에는 왕을 상징하는 '황포'라는 단어도 언급돼 있다.

밀풍군 묘

"그(심유현 지칭)가 반역할 마음을 품었을 뿐더러 밀풍군을 추대할 뜻이 있었고, 밀풍군은 이것을 모르기는 하나 늘 황포(黃袍)를 몸에 걸친다는 말을 하였다.' 하였습니다."-<영조실록 4년 5월 2일자>

무신란이 완전히 진압됐고, 밀풍군은 역모의 죄로 즉시 투옥됐다. 가까운 혈족으로서 영조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밀풍군을 가혹하게 다루지 말 것을 하명했다.

'국청(鞫廳)에 명하여 죄인 이탄(李坦)에게 가벼운 칼을 씌우고 양손에 고랑을 채우지 말며 먹을 것과 땅에 깔 것을 각별히 신칙(申飭)하게 하였다.'-<영조실록 4년 5월 8일자>

칼은 죄인에게 씌우던 형구의 일종으로 두껍고 긴 널빤지의 한끝에 구멍을 뚫어 죄인의 목을 끼우고 비녀장을 질렀다. 춘향전에서 변사또가 수청을 거부하자 춘향의 목에 씌운 형틀이 칼이다.

영조가 밀풍군을 역모죄로 다스리는 것을 계속 지연하자 대신들 사이에서 "나라에 법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법이 있다면 이것에 시행하지 않고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왕법(王法)을 시행하소서"(영조실록 5년 3월 28일자)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결국 영조는 밀풍군을 능지처참 하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진(自盡)을 명령했다. 이때가 영조 5년(1729)이었으나, 밀풍군 사건은 이것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26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노론계 대신들은 "밀풍군의 가족을 왜 살려주고 있느냐"고 계속 소를 올렸다. 결국 영조는 나머지 가족에 대한 '노륙'을 명령했다. 국어사전은 노륙에 대해 '남편 혹은 아비 죄 때문에 처자까지도 사형에 처하는 것'이라고 적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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