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혁연 대기자
조선시대 사간원은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기구로, 그 으뜸은 종3품 당상관인 대사간(大司諫)이다. 당상관은 정3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관리로, 지역하면 정사를 논할 때 堂에 오를 수 있는 품계를 말한다. 그 반대말은 당하관이다.
조선 효종 때의 대사간의 한 명으로 강백년(姜柏年·1603∼1681)이 있다. 그가 바로 전회에 언급한 표암 강세황의 할아버지다. 1648년 이른바 강빈(姜嬪) 신원 사건이 일어났다. 강빈은 소현세자의 빈으로,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7년에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를 미워한 시아버지 인조에 의해 후원별당에 감금됐다가 끝내 사사됐다. 이 여파로 그녀의 친정어머니마저 처형되고, 세 아들은 제주에 유배된 뒤 그 중 석철·석린 형제도 의혹 속에서 죽고 말았다.
공주 의당면 강백년 묘.
강백년은 대사간 입장에서 강빈의 신원(억울함을 풀어줌)을 간언했다. 말이 간언이지 인조의 최대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다. 결국 이 사건의 여파로 강백년은 우리고장 청풍군수로 좌천됐다. 그러나 청풍군수가 종6품인 점을 감안하면 품계가 수직 강하한 셈이다.
'황감을 대사간으로, 김식을 헌납으로, 최후윤을 정언으로, 홍우원을 봉교로 삼았다. 상이 특명으로 부제학 이기조를 삼척 부사로, 전 대사간 강백년을 청풍군수로 삼았다.'-<인조실록>
그러나 그의 좌천은 오래 가지는 않았다. 1653년(효종 4) 좌승지로 중앙직에 복귀한 후 여러 요직을 거쳐 우리고장 충청도 감사(관찰사)가 됐다. '이천기를 집의로, 서원리를 장령으로, 강백년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효종실록>
그는 충청도감사 시절 행정을 매우 잘 펼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임기가 만료됐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유임됐다. 조선 정조 때의 관찬서인 국조인물고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이) 교체되어 충청 감사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동법(大同法)을 처음으로 시행하였는데, 공이 설시하기를 조항에 맞게 하여 백성들의 편의에 힘썼으므로, 호서(湖西)에 지금까지도 칭송되고 있다. 조정에서 이 행정을 끝까지 맡기려고 하여 임기가 찼음에도 그대로 유임시켰다.'
강백년은 시작(詩作)에 능했다. 그가 지은 '청춘에 곱던 양자'라는 시조가 문집 안에 수록돼 있다.
'청춘에 곱던 양자(樣子) 임으로야 다 늙거다 / 이제 임을 보면 날인 줄 알으실까 / 진실로 날인줄 알아 보면 고대 죽다 설우랴.'
중세어라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인용구 중 '양자'는 '모습', '임으로야'는 '임으로 해서'의 옛말투이다. '늙거다'는 '늙었도다', '설우랴'는 '서러우랴'는 뜻이다. 그리고 이때의 임은 남녀간의 임이 아닌, 임금을 지칭한다.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청춘에 곱던 모습이 님으로 인해 다 늙었다 / 이제 님이 보면 난줄 알아나 보실까 / 진실로 난 줄 안아보면 당장 죽어도 무엇이 서러우랴.'
그는 말년에 고향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한계마을로 낙향, 여생을 보냈다. 그의 문집 이름이 '한계만록'인 것은 이 때문이다. 현재 그의 위패는 청원 낭성의 기암서원에 봉안돼 있고, 묘는 공주시 의당면 도신리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