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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2.06.06 13:46:33
  • 최종수정2022.06.06 13:46:45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재조명받는 속리산 법주사 벽암대사비.

[충북일보]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충북도 유형문화재 71호)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재조명받고 있다.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5교구 본사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찰이다.

이곳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 금강문 앞쪽을 보면 암반 위에 세워진 비석 2개가 눈에 들어온다. 이 비석이 바로 호국과 애민의 숭고한 넋을 담은 벽암대사비다.

벽암대사(1575~1660)는 보은 출신으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승병장이자 남한산성 증축에 참여하고,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법주사를 다시 세운 인물이다.

이 벽암대사비는 조선 현종 5년(1664)에 건립했으며, 비문은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가 쓴 것으로 전해진다. 비의 규모는 높이 2.13m, 폭 1.1m, 두께 35㎝이다.

벽암대사는 10세에 출가해 설묵의 제자가 됐다. 속리산,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에서 수도 정진했다.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해전에 참여해 왜적을 물리치는데 공적을 세웠다.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으로 임명돼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했다.

이에 인조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의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하사해 대사의 공적을 치하했다.

또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승려 3천여 명을 모집해 항마군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중 전쟁이 끝나자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벽암대사는 1646년(인조 24)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과 은거했다.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자신도 화엄사로 가서 지내다가 제자들에게 '도업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한 뒤 86세의 나이에 입적했다.

벽암대사비 옆의 봉교비는 조선 23대 순조왕 태실이다.

홍영의 군 문화재팀장은 "평생을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한 큰 어른 벽암대사의 뜻을 한 번쯤 되새겨 보는 호국보훈의 달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보은 / 김기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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