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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연

시인

시래기를 삶는다. 시래기를 삶는 냄새를 맡으면 어릴 적 외양간 한쪽 소죽 끓는 냄새가 떠오른다. 잘 발효된 마른 풀을 삶는 구수한 냄새가 지붕 낮은 집 안을 가득 채우던 시골 풍경을 더듬다가 문득, 선비 김뢰진이 떠올랐다.

김뢰진은 조선 시대 성리학의 요람이고 학문과 예를 숭상하던 고장인 경북 영주에 살던 선비였다. 그의 가옥이 영주 선비촌에 복원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은 그를 찾아가도 그와 그의 식솔은 만날 수 없고 빈집뿐이다.

정말 뜬금없이 시래기를 삶다가 조선 시대 한 선비를 떠올린 이유는 그가 살던 가옥의 모습 때문이다. 몇 해 전 겨울 이맘때쯤 안동 도산서원을 들른 후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다녀와 시를 한 편 썼다.

정월 보름 밑, 물어물어 경북 영주 선비촌에 사는 김뢰진을 찾아갔다. 초가지붕 아래 구멍이 숭숭한 까치구멍집에서 그가 버선발로 나와 잡목 사립을 열어주었다.

어림 보니 열일곱 평 그의 가옥이 내가 살던 주공아파트와 엇비슷할뿐더러 좁은 부엌이며 간곤한 세간들이 내 집에 온 듯 선비 김뢰진이 친근하였다

안동 도산서당에 들려 사 온 안동소주를 그와 나누었다. 선비 김뢰진은 퇴계 선생의 고고한 성리의 도(道)를 안주 삼아 잔을 받았다.

북풍에 흔들리는 마른 갈잎의 소리는 문풍지에 먹빛으로 번지는 구름 그림자를 끌고 가고, 나는 교교한 달빛을 안주 삼아 잔을 비웠다.

나는 사뭇 속이 짠한 것인데, 얼음장 같은 방고래에 앉아 빈속을 술로 채우고 있는 19세기 가난한 만학도 김뢰진과 귀퉁이가 닳아빠진 그의 서책들과 등잔 밑에서 삯바느질을 하다 졸고 있는 그의 아내와 잦은 기침으로 잠을 뒤척이는 어린 것들, 그리고 지척의 인동 장씨 대가 솟을대문 밖으로 풍겨오는 기름진 냄새 이 모두가 짠했다.

그의 눈 덮인 장독에는 빈 항아리가 많을 것이다.

그는 내 사는 세상은 어떠냐고 물었다. 이(理)도 기(氣)도 따지지 않는 21세기에도 그대처럼 빈 독을 가진 자가 적지 않다는 대답 대신 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새해에는 까치가 반가운 소식을 물고 김뢰진의 까치구멍집을 찾아오길 축원하며 술잔의 만월을 비우고 또 비우며 밤을 지새웠다.

-시 「선비 김뢰진」 전문

조선 시대 선비 김뢰진은 까치구멍집에 살았다. 까치구멍집은 환기와 채광을 위해 벽면에 둥근 구멍을 뚫은 집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 산간 지역에 분포하는 서민 가옥이다.

물론 영주 선비촌에는 사헌부감찰, 병마절도사를 지낸 인동 장씨 종택이나 군수와 현감을 역임한 두암 고택과 같은 높디높은 솟을대문과 대청마루에 오르려면 댓돌 예닐곱 계단을 거쳐야 하는 대가들도 복원되어 있다.

그에 비해 김뢰진의 가옥은 잡목 사립에 초가지붕을 얻은 소박한 가옥이다. 기름진 음식 냄새 대신 시래기 삶는 냄새가 흥건할 것 같은 집! 그래서 그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는 가난한 선비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의 가옥은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의 공간이라고 한다. 그 뜻을 풀어보면 선비 김뢰진은 가난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곧은 품성과 품격을 잃지 않고 산 사람인 것이다.

빈곤하면서도 품격 있는 삶을 살기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혈혈단신이라면 모를까 처자식을 둔 가장으로 어찌 가난에 초연해질 수 있겠냔 말이다. 참으로 짠해진다.

어느 해 겨울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를 찾아가 안동소주를 그와 밤새 나눴는지 모른다. 정말 그랬는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근심을 이겨내며 근근 버텨내는 삶들이 많아 그가 친근했을 것인데, 이 역시 짠하긴 마찬가지다.

쌀가루 같은 눈이 내린다. 쌀가루는 빈 항아리를 채우지 못하고 뚜껑 위로 켜켜이 쌓이고 있다. 곧 있을 대선이 끝나면 새 대통령이 나라를 이끌 것이다. 새로운 대한민국에선 까치구멍집에 사는 김뢰진 같은 이들에게 더 많은 희망을 안겨주는 반가운 소식들이 들리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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