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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에 대한 열망…여성독립운동가의 불꽃같은 삶

충북 여성독립운동가 투쟁사 재조명
男 1만5천454명 서훈… 女 477명 그쳐
"폭넓은 활동 인정… 포상·선양 시급"

  • 웹출고시간2020.08.13 20:51:22
  • 최종수정2020.08.13 20:51:22

충북도가 지역 연고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전국 최초로 마련한 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 전경.

ⓒ 유소라기자
[충북일보] "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1919년 3월 1일 이후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 수감된 유관순 등 7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공포의 밤을 이겨내고 용기를 북돋으려 옥중에서 만들어 불렀던 창가(唱歌)다.

외세 침략과 국권 강탈로 이어지는 민족의 위기 앞에서 남녀노소 존재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남성과 함께 총칼을 들고 싸웠을 뿐 아니라 곳곳에서 눈과 귀, 손발을 자처했던 부인과 딸, 며느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금가락지를 내놓았고, 3·1만세운동에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항일단체를 만들고 무장항일투쟁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으며, 독립운동가를 내조하며 보이지 않게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3월까지 남성 독립운동가 1만5천454명이 서훈을 받을 동안 여성 독립운동가는 3%가량인 477명만 서훈을 받는 데 그쳤다.

독립운동가 공적을 따질 때 주로 기록이나 직책에 따라 공훈이 가려지고, 여성이 한 일들은 보조적인 것으로 취급돼 기록이 남지 않은 탓이다.

오랫동안 남성 중심의 독립운동사에 가려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대한 조명이 설핏해졌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충북에도 독립에 대한 열망 하나로 민족의 아픔을 끌어 안은 채 불꽃같은 삶의 살다간 여성들이 있다.

윤희순(尹熙順, 1860~1935) 선생은 한말 최초 여성의병장으로 1895~1908년 춘천 등지에서 의병투쟁에 참여하는 등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11년엔 만주로 망명해 시부와 남편 독립운동을 내조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 박자혜(朴慈惠, 1895~1943) 선생은 간호사로 일하며 3·1운동 부상자를 치료하고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02년 신채호 선생과 결혼 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연미당(延薇堂, 1908~1981) 선생은 윤봉길 의사 의거 당시 폭탄을 보자기에 싸준 인물로 전해진다. 1930년 상하이에서 한인여자청년동맹 조직했으며, 남편 엄항섭과 함께 임시정부 지킴이로 활동했다.

임수명(任壽命, 1894~1924) 선생은 항일비밀문서 연락과 배포 등을 지원하다 남편인 신팔균 장군 전사 소식을 듣고 자결했다.

전투·정보공작에 두루 능했던 여자 광복군 신정숙(申貞淑, 1910~1997) 선생은 중국으로 가 조선의용대에 참여했으며, 김구 선생 비서로도 일했다.

어윤희(魚允姬, 1880~1961)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 주도한 인물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도 항일투쟁을 주도했다.

이화숙(李華淑, 1893~1978) 선생은 임시정부 참여와 미주지역 독립자금 모집의 주역이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으며, 정양필 대한애국부인회장과 결혼 후 미주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임시정부 안살림을 꾸려나간 오건해(吳健海, 1894~1963) 선생은 신건식과 결혼 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창립했으며,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했다.

신순호(申順浩, 1922~2009) 선생은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로 활동했으며, 1940년엔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남편 박영준과 함께 활약했다.

박재복(朴在福, 1918~1998) 선새은 조선 노동자들의 항일의식을 깨운 선각자로 불린다. 1938년 군시제사 주식회사 대전공장을 다니며 여성 노동자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동안 역사 속에 묻혀져 있던 이들의 삶은 최근 충북도가 전국 최초로 마련한 충북미래여성플라자 내 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이곳에는 충북을 본적으로 하거나 충북과 연고를 갖고 유족의 흉상 제작 동의가 있는 2018년까지의 서훈대상자 10명의 흉상과 2019년 이후 대통령표창을 받은 3명 등 모두 16명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전시돼 있다.

도내 여성단체 관계자는 "대한민국 100년의 주춧돌을 놓은 독립운동가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명받지 못해 왔다"면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단순한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을 한 남자들 뿐만 아니라 그를 뒷바라지한 아내들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며 "남자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보조한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아직까지 수형기록이 있음에도 여전히 서훈되지 못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있다"며 "하루빨리 이들에 대한 포상뿐 아니라 선양도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 유소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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