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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초벌 씻은 쌀뜨물에 벌레똥집이 수북하다. 보통 찬바람이 나면 없어지는데 올해는 늦더위가 길었다. 얼마나 극성인지 이남박에 박박 씻어야 말끔해진다. 애벌 받은 뜨물로 국 끓일 때도 미심쩍어 체에 밭친다.

번거로운 쌀 씻기가 끝날 때마다 어머님은 "여름내 돼지 뒷다리 하나는 제대로 먹었지"라고 하신다. 아무리 헹궈도 속속들이 잡는 건 역부족이고 시나브로 먹다 보면 그렇겠지 싶다. 장마가 끝날 즈음 쌀통을 열어보면 바구미와 쌀벌레가 바글바글했다. 일일이 퍼서 신문지에 쏟아놓으면 어마 뜨거라 도망치던 벌레와 이어지는 뒷다리 타령.

지금은 벌레라도 바글거리지는 않는다. 방앗간에서 찧은 쌀은 벌레똥집이 나오는데 사 먹는 쌀은 출하할 때부터 세균을 죽인다. 어른들이 벌레퉁이 쌀을 보고도 돼지 뒷다리 어쩌구는 괘씸죄보다는 너희도 먹고 우리도 포식했다는 뜻이다. 가뜩이나 더운 날 벌레를 잡는 게 수월하지는 않으나 벌레 먹은 쌀이라도 덕분에 돼지 뒷다리 하나 챙겼노라고 너스레에 엉너리칠 수 있으면 건강에는 나쁘지 않다.

오후에는 쌈장을 버무렸다. 풋고추와 호박을 다지고 양념을 준비한 뒤 장독에 올라갔다. 된장항아리에 가시가 꾀었다. 가시는 고상한 표현이고 구더기 두 마리가 스멀거린다. 사나흘 열어보지 않으면 그 짝이다. 잠깐 망설였으나 어머님도 죽이지는 않으셨다는 생각에 묵묵히 집어냈다. 된장을 파먹어도 오히려 가시라고 대접하던 그 말투. 뒤미처 기를 쓰고 달아나는 벌레가 보이고 그게 더 징그러웠는데 이제는 푼푼한 느낌이다.

쌀을 말릴 때 기어 나오는 벌레도 죽이기로 하면 실컷 갉아먹게 한 뒤에 무슨 소용이람. 가르마 타듯 길을 터주면 곧장 나와 썰썰 기는 녀석들. 가다가 돌 틈에 끼어 죽기도 하지만 일단은 살려 보낸다. 나물을 데칠 때도 찬물로 헹군 뒤 버린다. 팔팔 끓는 물을 쏟으면 물받이 속의 벌레는 그냥 죽는다. 세제도 독하지만 붓는 대로 죽게 될 끓는 물이다.

최근에는 무차별로 죽이는 방식이다. 대량으로 짓는 농사다 보니 마구잡이로 뿌린다. 우리 어릴 적에는 배추벌레도 손으로 집어냈다. 벌레라도 몰살시키는 건 잔인한 습성 이전에 생태계가 파괴된다. 벌레가 없으면 해충을 먹는 새가 줄고 먹이사슬 균형이 깨진다. 벌레는 극성이고 소독약도 강력해진다. 어디쯤 가야 끝이 날는지.

그 때문이었을까. 옛날부터 낚시는 몰라도 그물 치는 것은 아니라고 했던 이유가. 고기 잡는 어부 외에 다른 사람까지라면 씨가 마른다. 벌레라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이유는 없다. 최근 나오는 쌀이 바구미가 없어 좋기는 한데 소량이나마 약품이 들어갔다면 일부는 먹게 된다. 하나가 부작용으로 남을 바에는 영향이 적은 쪽을 택해야 맞다.

내년에도 나는 또 벌레와 실랑이를 벌이겠지. 사 먹는 된장은 싫고 쌀도 방앗간 표를 고집하는 한 피할 수 없다. 벌레도 꾀지 않는 쌀을 먹으면서 건강을 따진들 무슨 소용이람. 그럴 바에는 벌레도 먹을 수 있고 우리도 좋은 방향을 찾아야겠다.

그나마 이제는 별반 징그럽지 않다. 쌀까지 파먹어 여름내 살찐 벌레였으니 굵은 뒷다리 품계는 받을만했다. 속담도 아니고 오묘한 뜻도 없이 어머님과 집안 어른들 몇 몇이 되뇌시던 말씀이다. 여름내 소행을 탓하기보다는 늬들 멋대로 득시글거렸으니 인심은 인심대로 쓰고 프리미엄 덕택에 돼지 뒷다리쯤은 너끈히 먹었다는 여유만만 해학적이다. 부풀린 말처럼도 들리지만 묵인해줘도 상관은 없겠지.

된장항아리의 가시를 골라내고 쌀통을 비운 뒤 말리는 것도 재미있다. 찬바람이 나면 약속이나 한 듯 씨가 지곤 해서 죽일 것까지는 없다는 톱밥이 나왔겠다. 세상은 손해 본 것 같아도 남는 게 있고 돈으로 환산이 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느루 가는 건 물론 배불리 먹지 않아도 든든한 느낌으로 그보다 더 한 건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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