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이정희

수필가

　이제야 맑은 소리가 나온다. 아무리 켜도 쇳소리처럼 뻑뻑하게 들리더니 제법 바이올린 특유의 맑고 또렷한 선율이 울려 퍼진다. 불현듯 가슴이 아려 오고 먹먹해지던 그 기분. 슬픔에서 발원된 음색을 꿈꾸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적 감상에 빠져들곤 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명품 바이올린 얘기를 꺼내셨다. 로키산맥의 3천m 지점에 수목한계선이 있다고. 거기 나무는 또 거센 바람 때문에 무릎을 꿇는 것 같이 자라는데 그게 최고 명품 악기의 소재가 된다고 했다. 즉시로 인생 노트를 펴 놓고는 본명과 아명과 예명을 각각 '무릎나무', '생각하는 나무'와 '기도하는 나무'로 지었다. 바람에 휘둘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운명의 일대기를 적어 둔 것이다.

　나무를 생각하면 바람이 지나갔다. 특별히 무릎나무는 관절마다 바람이 파고들 것 같다. 무릎을 꿇을 때는 우주도 함께 숙였다. 이파리 속속 냉기가 파고들 때는 바람보다 빨리 눕는 춤사위를 펼쳤다. 박제된 뿌리로 삭풍에 맞서오던 바람나무 교향곡. 허구한 날 바람 때문에 득음이 가능했다. 무릎을 꿇고 산 것은 짠한 일이되 클래식 악기 특유의 음(音)은 그렇게 조성된다. 눈물로 작곡한 바람 노래는 삶을 연주하는 우리들 정서와도 어지간했다.

　묘하게 굽은 바이올린 몸체와 바람소리가 맞물린다. 바람의 덫에 걸려 있던 나무가 마지막 물방울을 털어내면서 쏟아져 나온 희대의 선율. 바이올린이 애절한 뉘앙스의 음악에 잘 어울리는 것도 그에 단련된 효과다. 그 나무 외에도 북쪽 방향의 가지가 적당하거니와 무릎 꿇고 자란 나무판의 선율이라 더 부드럽다. 하늘바라기 산에서 바람을 조각해 온 곡절 때문에 명품 악기의 효시가 된 걸까.

　수목한계선이 '사느냐 못 사느냐'의 경계라면 무릎나무는 '사느냐 죽느냐'의 분기점에서 방황했다. 눈물로 새긴 나이테는 미세한 음까지 반응하면서 절묘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산꼭대기 바람모지에서, 여기까지라고 더 이상은 안 된다는 한계선에 뿌리박으면서 촘촘한 나이테가 생긴 것처럼.

　그 다음은 '생각하는 나무'이다. 그가 택한 바람은 견디다 못해 쓰러진 자들의 마지막 끈이고 어둠의 블랙홀에서 빠져나갈 통로다. 천년을 살고 만년을 버틴들 무릎 이상이야 자랄까마는 쟁여둔 교향곡은 눈물로써만 판독이 된다. 무릎을 꿇다 보면 무슨 생각이든 했을 테니까.

　무릎나무가 아니어도 외로움에 접붙인 나무는 한 발짝도 뗄 수 없고 무릎나무는 꿇기까지 하지만 아름다움은 고통이다. 눈 감으면 보랏빛과 겹쳐진 띠가 어른거렸다. 창밖으로 눈보라가 날리던 그 날, 바람의 현을 차고 나간 휘파람도 환상적인 빛깔로 흩어졌다. 눈 감아도 볼 수 있다면 최고 아름다운 빛깔이라고 했다가 바람의 활로 켜대는 선율에 매료된 것이다.

　마지막 예명은 '기도하는 나무'였다. 바람의 성(成)에서 자란 보드기 나무가 세상을 꿇어앉히고 소망나무로 자란 일대기다. 언젠가 무릎을 펴고 일어나면 가지는 하늘에까지 닿고 숲도 일시에 푸르러질 것이다. 아파도 울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토해낸 속울음이다. 무릎 꿇고 자란 나무가 고운 소리를 내듯 내 마음의 강 어디쯤 까까비알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절망으로 애절한 느낌을 실어 보내던 기억.

　꿈속에서도 펴지 못한 관절은 먼 허공에 떠올랐다. 오래 꿇어야 되는 아픔도 운명의 횃대에 걸어뒀다. 웬만치 자라면 또 꿇어야 했다. 한 번 두 번 그러다가 자그마한 산맥으로 물결치는 모양이 됐다. 무릎나무도 바이올린도 온통 휘어졌지만 우물보다 깊은 침묵에서도 하늘은 푸르고 초록별 반짝인다. 실낱같은 소망을 품었으면 말라죽었다. 절망의 언덕에는 눈 감아야 들리는 소리방이 있고 거기서 파생된 선율이었다. 천혜의 고지 로키산맥은 소망의 골짜기라고 하듯.

　오늘도 나무는 바람의 성벽에서 하늘을 꿇어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