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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8.12.16 15:43:41
  • 최종수정2018.12.16 17:56:58

이정희

수필가

 벼락을 맞았나 보다. 선 채로 까맣게 타버렸다. 바람 부는 산에서 가뜩이나 살풍경한데 만약에 오동나무였다면 장인들이 환상의 나무로 친다는 가야금의 소재가 되겠지 싶어 묘한 느낌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이고, 장인들은 돌 틈에서 말라 죽은 오동나무 즉 석상오동(石上梧桐)을 찾아 만들면서 아쉬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막에 뿌리박은 것도 모자라 뒤틀린 채 자라야 했던 오동나무 한그루. 본 적도 없지만 좋은 소리는 모름지기 그렇게 나온다. 돌 틈에서 하루인들 편했을까마는 그 때문에 자기만의 음정을 창출하게 됐다. 명품 악기의 소재가 되는 나무일수록 춥고 건조한 지역에서 자란다. 돌 틈에서도 능히 견디는 석상오동은 가히 신비적 존재려니와 벼락까지 맞은 나무라면 더더욱 금상첨화라는 뜻이었겠다.

 벼락 맞은 나무로 최고 좋은 가야금을 만들 수 있다니 믿기지 않는 중에도 그럴싸하다. 어쩌다 가야금 산조를 들을 때의 그, 줄이라도 끊어질 듯 격한 휘몰이와 자진모리가 춤추듯 고빗사위를 넘기는 것 또한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이미지 여전했다. 줄과 줄 사이를 넘나드는 빠른 가락이야말로 엄청난 힘으로 내리치는 서슬 그대로였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타 죽은 나무는 불행이되 훨씬 좋은 악기로 태어난다면 놀라운 일일 수밖에.

 벼락도 벼락이지만, 휘거나 굽어서 재목감도 되지 않는 나무가 특별히 명품 악기의 재료가 되듯 대금의 최고 소재인 쌍골죽 또한 비슷하게 자랐다. 병이 들면서 양쪽으로 패이고 속만 두터워진 쌍골죽 대나무. 대금을 만들 때는 필요한 만치 파내고 불에 달군 뒤 똑바로 펴는 작업에 들어간다. 대나무는 보통 하나로 뚫려 있지만 이따금 기형인 채로 자라는, 바로 그 쌍골죽으로 만들어서 특별히 맑고 야무진 소리가 나는 것인데 그러자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연히 대금 소리를 들을 때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은 선율도 그렇게 나오는가 싶어 짠하다. 하지만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고 했다. '조셉 마샬'이 쓴 책 제목이다. 활을 만들 때 우정 벼락 맞은 양물푸레나무를 찾는다는 라코타 전사들 이야기다. 어느 날 벼락을 맞은 채 죽어버렸다가 라코타 부족의 활로 다시금 태어났다. 그 나무로 만든 활이 유달리 강하고 튼튼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게 참으로 감동적이다. 활을 당길 때마다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의 팽팽한 힘이 남다른 탄력성으로 작용했다. 번개가 내리치면서 순간적으로 건조된 나무라 최고 튼튼한 활이 됐을 테지.

 바람을 지나가게 하는 라코타 부족의 일면을 보는 듯하다. 대 평원에 사는 인디언에게 활은 필수품이었지만 왜 하필 벼락 맞은 거라야 되는지. 이를테면 오래 전부터 내려온 인디언의 생활 지침 아니었을까. 라코타인들에게도 폭풍의 역사가 있었고 그래서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유럽에서 건너 온 백인들은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어서 원주민을 길들이려 했으나 그들은 굽히지 않았다. 활을 만들 때도 벼락 맞은 나무를 찾아다니는 부족인데 누가 넘어뜨리겠는가.

 라코타 전사들이 활을 만들 때 벼락 맞은 물푸레나무를 택하는 것은 고난이 최고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그로써 새까맣게 타 죽은 나무를 찾아내 희귀한 활을 만드는 안목을 키웠다. 자기를 죽이지 못한 것이 자기를 가장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 부족이었으니까. 운명이 나를 꺾지 못했다면 그 또한 최고 행복의 원천이다. 바람은 힘들어도 지나가게만 하면 축복이 된다.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바에는 잠잠해질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것이다. 활을 만들 때마다 엄청난 벼락의 서슬을 익히면서 바람을 지나가게 하는 부족들처럼 그렇게. 고난이 크면 영광도 크다. 그 배경을 인생 노트에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다.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 있는 산자락 어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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