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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외딴 집 모퉁이에 함지박만한 가을이 들었다. 마당에는 빨랫줄만 매여 있고 텃밭 가장자리에 구절초며 산국이 어우러졌다. 완연한 가을인가 싶어지면서 40여 년 전의 가을이 스쳐간다. 단풍을 찾아다니다가 군청색 하늘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 기억들.

필름을 돌리다 보면 초가집 마당이 보였다. 이어서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이 있고 가을이면 고추잠자리가 빡빡하게 모여든다. 수없이 작은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은 것 같다. 가까이 가면 튕겨 오르듯 날아가 버린다. 진짜, 이번에야말로 진짜 하고 꽁지를 잡는 순간 달아났다. 얼마 후에는 하늘로 올라간 잠자리가 다시 내려왔다. 하늘에서도 누군가 잠자리를 잡는다는 생각에 아쉽지 않았다.

그 때의 관심사는 바지랑대 끝에 앉은 잠자리였다. 지금 보면 막대기 정도로 짧지만 그 때는 왜 그렇게 높아 보였는지 모른다. 떨어질까 봐 늘 조마조마했다. 야트막한 빨랫줄에는 서로 의지해 있지만 바지랑대 끝의 잠자리는 높은 곳에 오직 혼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떨어지는 건 아닌가 싶어 날아갈 때까지 바라보았다.

이어서 나타난 영상은 쪽마루다. 바깥채에 판자를 이어 붙인 쪽마루는 가을이면 빠끔할 틈이 없었다. 구멍 뚫린 도드미에는 갓 따다 놓은 팥 그루터기가 있고 씨오쟁이 안에는 아욱과 상추 등의 씨앗 덤불이 올망졸망했다. 엉성한 소쿠리에는 포로소롬 녹두가 배배 틀어지고 쪽마루 밑 얼금얼금한 멍석에는 작두콩 꼬투리가 널렸다.

가을이면 햇살도 바스러지는지 녹두며 콩 알갱이가 조목조목 드러난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도라지를 말리고 일변 호박을 켜서 널었다. 열흘 이상 가물다 보면 호박고지는 도라지보다 뽀얗게 마른다. 쪽마루는 갈수록 비좁아서 시렁에까지 매달았다. 곶감과 호박고지 무말랭이를 실에 꿰어 매달면 금방 새들새들해졌다. 서리거둠으로 딴 고추까지 꿰어 말리다 보면 초가집 흙벽은 빤할 날이 없다.

다음은 쪽마루에 잇닿은 헛간이다. 응달이고 시원해서 그런지 주로 곡식을 간수하게 된다. 쌀가마니는 물론 수수와 팥이 모듬모듬 쌓였다. 분량도 쪽마루에 있는 것보다 많아서 훨씬 풍족해 보인다. 쪽마루에서 조금씩 말려 뒀다가 그릇 하나에 모아두는 셈이다. 늦가을이면 맷방석만하게 늙은 호박과 토란 고구마 등속도 일일이 함지에 담아 보관했다.

눈썹만했던 달이 보름달이 되는 것처럼 새알심만한 박도 축구공만 해졌다. 지붕에 쪽반달이 머물면 자그마한 박도 달처럼 크게 빛난다. 초승달에서 온달로 차오르는 것 같다. 새알심 같은 박은 찬 서리를 맞고 오래 남아 있었다. 서리 맞을 때마다 붉게 물드는 단풍처럼 박 또한 서리 맞아 오랜 날 지루하도록 속을 채운다.

하기야 박뿐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따 모으는 팥이야 콩이야 모든 것 역시 가뭄을 견디고 비바람에 큰 것들이다. 늦가을 박과는 달리 따스할 때 자랐어도 천둥번개 속에서 간을 졸이며 익었다.

비바람이 물러난 뒤 영그는 박은 서리 맞아 크는 과정을 밟는 것뿐이다. 절기가 빠른 해는 지붕에서 철수하기도 전에 첫눈이 내렸다. 따스할 때는 비바람이 동반되고 어떤 것은 차가운 날씨를 무릅쓰며 속을 채우고 익는다. 모든 익힘은 추운 날씨에 서리까지 동반되는 설상가상 같은 역경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득히 오래 전의 늦가을 터널에서 배운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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