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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수필가

창밖으로 저녁볕이 따갑다. 멀리 노을이 지고 넘어가는 태양을 에워싼 구름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하루하루 짧아지는 가을 해가 그처럼 강렬할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럽다. 태풍이 지난 뒤의 푸른 하늘과 선들바람은 전형적인 초가을 날씨건만 한낮에는 볕이 또 얼마나 강한지 몰랐다.

여름은 끝났다고 한시름 놓은 터에 다시 또 더위가 올까 싶어 심란했는데 이제 막 숙이는 벼이삭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들판에 널린 곡식이며 과일이 익기 위해서라도 늦더위는 계속되어야 했다. 모든 곡식은 가을 해 중에서도 넘어가는 까치놀에 더 옹골차게 영근다니 허우대를 키우는 한여름 볕보다 알갱이를 익히는 셈이다.

까치놀은 해가 지기 직전에 비치는 얼마 되지 않는 볕을 말하는데, 그게 그처럼 놀라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땡볕에만 익는 줄 알았던 것에 비하면 뜻밖이지만 쨍쨍한 가을볕을 보면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볕 발은 약하고 시간도 짧은 것 때문에 더 온전히 영근다는 게 자못 놀랍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남은 날을 익혀야 될까. 까치놀을 그저 예쁜 말로만 생각해 왔던 만큼 남다른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는 초조해지다가도 농사꾼이 같은 값이면 서쪽의 논밭을 택한다는 말에 힘을 얻었다.

하루를 익히며 넘어가는 해거름 볕과 한 해를 구워내는 가을볕의 의미도 새삼스럽다. 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노을처럼 내리막길의 삶이 원숙해진다. 보통 지는 볕은, 더구나 가을볕은 약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삼십 대의 시간은 아침볕 같고, 나이가 들 때는 해거름 볕 같다고 여겨 왔는데 변덕스러운 가을 날씨에 곡식이 익는다는 건 진정 뜻밖이었다.

지금 이 시간도 하루가 꼴깍 진 것은 아니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고 밀쳐 두기 쉬운 볕으로 완성도가 높아진다. 짧은 볕이라서 소중했다면 최대한 받아서 익혀야겠지. 볕이 약하다는 투정이 나올 수 있지만, 정작 필요한 게 마지막까지 익힐 수 있는 당도라면 그 때 충분히 익힐 일이다. 짧은 가을 해라도 까치놀이라는 비장카드가 있다는 것은 힘겨운 삶의 돌파구가 된다.

마지막 볕이라도 그냥 말리면 부스러지기 때문에 눅눅했던 날씨가 밤으로 건조해진다. 천고마비의 계절도 맑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을에도 여름 못지않게 태풍이 지나간다. 거둠을 위해 변덕맞기도 한 날씨처럼 악조건 또한 예고 없이 주어지지만, 가을비에 더 말갛게 씻기는 것처럼 때늦은 역경에 원숙한 인품으로 다져진다.

가을볕에 익지 않으면 풋내가 난다. 송편을 빚을 때 소를 박는 콩도 무르익지 않으면 풋내가 난다. 다 익은 것 같은데도 그랬다. 맛이 없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맛있지만 겨울을 나고 이듬해 씨를 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과일도 설익으면 자칫 떫은맛이 난다. 겉만 익었을 뿐 깊은 맛까지는 침투되지 않았다.

바로 그 결정적인 부분을 익히는 게 가을볕이다. 마지막 하나가 첨가되지 않고서는 깊은 맛을 내기 어렵고 그게 또 익어도 익은 게 아닌 허점을 보완한다. 모든 곡식은 해거름 가을볕에 달그락 소리가 나게 영근다. 일조량은 많지 않고 시간은 짧아도 그래서 더욱 숨 가쁘게 익는 것처럼 나 역시 볕 하나라도 알뜰히 받아 시시콜콜 익히는 날들이고 싶다. 때가 되지 않았으면 기다려야겠지. 가을이면 해껏 영그는 곡식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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