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스타 루틴(barista routine) 가운데 커피 원두를 갈 때 물을 뿌려주는 동작이 추가될 것 같다. 데이비드 로스(David Ross)가 2005년 처음 제안했던 'RDT'가 미국 오리건대학교 크리스토퍼 헨돈 교수의 논문으로 실효성이 입증됐다.
카페 현장에서 바리스타로 활동하던 로스는 커피 원두에 물을 살짝 뿌려 고르게 섞어 준 뒤 분쇄하면 덩어리지고 미세물질이 날리는 현상이 줄어든다며 주변에 권했다. 그러나 볶은 원두가 물과 접촉하면 향미가 떨어지고, 그라인더 칼날도 녹슬게 된다는 우려로 인해 큰 힘을 받지 못했다.
2007년 세계바리스타챔피언십(WBC)에서 우승한 영국의 제임스 호프만이 2017년 '커피, 정전기는 가라'(Coffee: No More Static)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 'RDT' 시연과 함께 그 효과를 보여주면서 다시 주목을 끌었다. 호프만은 커피 원두에 뿌리는 물의 양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도꼭지에서 뻗어 나오는 물에 스푼의 손잡이 부분을 살짝 스치는 방식을 소개했다. 그는 칼날을 녹슬게 하는 걱정에 대해 그라인더의 칼날이 회전할 때 발생하는 마찰열로 인해 모두 증발했다고 안심시켰다.
물이 커피 원두를 고속 회전하여 분쇄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전기를 상당부분 해소하면서 한 잔에 담기는 커피의 향미가 더욱 풍성해졌다. 수율도 높아지면서 사용하는 커피의 양을 줄이는 효과도 보았다. 바리스타 사이에서 커피 분쇄 때 물기를 묻히는 방식이 RDT(Ross Droplet Technique)로 불리며 새로운 기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용어를 직역하면 '로스의 물뿌리기 기술'쯤이 된다.
'경험'이 '지식'이 되는 길은 아름답다. 헨돈 교수는 바리스타가 현장에서 찾아낸 기술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커피 분쇄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전기를 수분으로 제어하기'(Moisture-controlled triboelectrification during coffee grinding)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만들었다. 화학과 교수인 그는 같은 대학의 화산학 전문가인 조수아 멘데스 하퍼 교수와 공동연구를 진행했는데, RDT가 맛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화산폭발에 비유해 설명했다.
화산이 폭발할 때 마그마가 작은 입자로 분해돼 연기처럼 분출된다. 입자들이 서로 마찰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정전기는 수십차례 번개를 낼 정도이다. 1분에 1600~2000회로 고속 회전하는 칼날 속에서 미세한 가루는 전하가 축적돼 정전기(Static electricity)를 갖게 된다. 가루들은 제각각 (-)전기나 (+)전기를 나타내 서로 밀거나 당긴다. 이 때문에 가루가 뭉치거나 사방으로 날리고 장비에 달라붙는다.
정전기를 띤 커피 가루의 향미는 곧 번개처럼 공중으로 흩어진다. 또 엉겨 붙은 덩어리들이 물의 흐름을 방해해 성분이 과다 추출되거나 부족해져 맛이 나빠진다. 전체적으로는 수율이 떨어져 일정 수준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양의 커피를 사용해야 한다. 헨돈 교수는 물의 흐름을 고르고 하는 것으로 커피 사용량을 25%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커피 원두 1kg을 사용하는 카페라면 재료비에서 250g어치를 아낄 수 있는 것이다.
RDT를 따라하기는 어렵지 않다. 원두 10g에 물을 200μL(0.2mL) 정도 뿌리면 충분하다. 분무기에 물을 담아 한 두 번 뿌려주는 분량이다. 이렇게 하면 에스프레소를 추출 시간이 더 길어지고 맛도 더 진해진다. 커피는 과학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커피에 숨겨진 진실은 얼마나 될까· 커피 경험을 지식으로 거두어 내는 '커피학과'의 신설, 커피학의 제도화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