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이 없다고요. 어떻게 커피를 시음하라는 거지."
지난 7일 오전 10시 '경기도 세계커피콩축제'가 열린 시흥시 은행동 은계호수공원. 인도 부스에서 몬순 커피를 맛보려고 기다리던 관람객들이 일회용컵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관람객들이 입장하면서 웅성거림은 카메룬, 케냐, 코스타리카, 파푸아뉴기니,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미얀마, 라오스, 필리핀 등 전체 부스로 퍼졌다. 축제조직위 관계자들과 커피 부스 운영자들의 입술은 바짝 타오르기 시작했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표정에는 비장함이 묻어났다.
사실 이 광경은 준비 소홀로 인해 벌어진 '소동'이 아니라 '자초한 사고'였다. 축제를 주최한 시흥시와 주관한 은계호수상인연합회는 '일회용품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 환경축제'로 행사를 치러내자고 의기투합했다. 일각에서는 세계 각지의 고급 커피를 시음시켜 주겠다고 불러 놓고는 시음할 컵을 준비하지 않으면 민원이 쇄도할 것이라고 지적했지만, 상인연합회측은 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민원이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며 각오를 다진 터였다. 시흥시청도 "일회용품 사용 금지에 따른 불평불만을 더 이상 피해가지 말자" "이 과제를 대물림하지 말고 우리 시대에 해결하자"며 가시밭길을 자처했다.
이런 결의에 따른 걱정거리는 또 있었다. 해외와 국내 먼 거리에서 찾아와 부스를 설치하고 운영한 커피재배자들과 생두 유통업체들의 반응이 어떨지 시선이 쏠렸다. 처음에는 "시음을 많이 해야 커피도 소개하고 판매도 많이 할 수 있다"는 불멘소리가 나왔다. 일부 부스는 "일회용컵에 따라 시음하는 게 관례"라면서 그 정도의 편의는 제공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이에 축제조직위측은 "사전 예고한 시간에 다회용기 렌탈부스에서 시음용 컵을 1천 원에 입대할 것"이라며 부스 운영자들에게 견뎌달라고 당부했고, 관람객 사이를 누비며 양해해 줄 것을 부탁했다.
부스마다 길게 늘어지는 줄과 주인을 찾지 못하고 식어가는 커피, 눈 앞에 보이는 다량의 종이컵들… 일회용컵에 커피를 따라 나누어 주자는 유혹과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신념이 갈등을 빚으며 한계로 치닫는 순간. 문제는 놀랍게도 관람객들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관람객들 사이에서는 항의가 터져 나오지 않았다. 한 두 명이 차분하게 차로 돌아가 텀블러를 가져오거나 사용하던 종이컵을 들고 나와 행사장에 지정된 장소에서 물로 헹구어 커피를 담는데 사용했다. 이런 행동은 관람객들 사이에 급속히 퍼졌다. 다회용 용기를 구하러 주변 상점이나 차량으로 퍼지는 관람객들의 모습은 디아스포라처럼 장엄하면서도 비장해 보였다.
대회 조직위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게 되는구나'하는 읊조림이 퍼져 나갔다. 그들에게는 천둥과 같은 울림이었을 것이다. 부스 한 켠에 올려져 있던 일회용컵들은 모두 종이박스에 도로 갇혔다. 8일까지 이어진 세계커피콩축제에 다녀간 관람객은 1만5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틀간 필자가 일부러 찾아낸 종이컵은 11개였다. 모두 첫날 개막전에 사용된 컵이었다. 경기도 세계커피콩축제는 '종이컵이 없는 커피 시음축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됐다. 가방 속에서 홍차잔을 조심스럽게 꺼내 커피를 여기에 따라 달라고 부스에 내민 젊은 부부의 아름다움 뒷모습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일회용품 사용 규제를 단속이나 보증금과 같은 정책 위주로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시민들의 문화적 품격을 믿는다면 다른 방향의 접근도 가능하다. 홍차잔을 꺼낸 부부의 모습을 찍어 올해의 포토상을 주고 싶었다. 참으로 행복한 커피 축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