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틴아라샨 관문
ⓒ함우석 주필
도심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초원이다. 시야가 순식간에 초록빛으로 가득 찬다. 부드럽고 완만한 초원의 선이 이어진다. 맑게 푸른 하늘가에 뭉게구름이 걸린다. 초록색 캔버스 위에 흰 점이 툭툭 찍힌다. 초원 위로 서 있는 유목민 텐트 유르트다. 설산이 초원 너머 호위를 하듯 늘어선다. 해발 1600m 국립공원 앞에 도착한다.
알틴아라샨은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다. 아니 알프스와 안데스를 모여 논 것 같다. 말 소 양 떼가 알프스와 거의 흡사하다. 집들이 없는 게 다르다면 다른 풍경이다. 고원엔 눈이 녹고 야생화가 앞 다퉈 핀다. 길옆 산중턱 어디를 가도 들꽃 정원이다. 계곡이 끝날 때까지 침엽수림이다. 왜 알프스고 스위스인지 즉각 실감한다.
트레킹 출발지점 해발고도가 아주 높다. 초입부터 계곡수가 천둥치듯 울어댄다. 굽이치는 물이 포효하듯 거칠고 사납다. 올곧은 침엽수가 협곡을 빼곡히 채운다. 사방이 초록 가득하니 걷기엔 그만이다. 잠시 가쁜 숨 몰아쉬며 둔덕을 올라선다. 저 멀리 협곡 사이로 팔라트카가 보인다. 팔라트카는 러시아어로 텐트를 뜻한다.
알틴아라샨 계곡을 따라 트레킹을 한다. 5000m 산정이 하얀 눈을 이고 반긴다. 6시간을 가는 내내 물소리가 요란하다. 길 따라 수많은 야생화들이 수줍게 핀다. 먹구름이 갑자기 몰려와 비가 쏟아진다. 비옷을 꺼내서 입고 가던 길을 마저 간다. 산정의 아라쿨에서 내린 물이 엄청나다. 그 덕에 계곡 주변 풀과 나무가 건강하다.
알틴아랴샨 산장
ⓒ함우석 주필
고되게 된 비알 오르니 풍경이 기막히다. 해발고도 2600m 아라샨 산장마을이다. 푸른 초원마을과 하얀 유르트가 멋지다. 그 위에 말과 양이 유유히 풀을 뜯는다. 진초록 위에 선명한 색깔의 꽃을 피운다. 산 따라 도열한 가문비나무가 웅장하다. 저 멀리 하얀 설산을 더 아름답게 한다. 가끔 러시아제 차량이 풍경을 방해한다.
매캐함은 한동안 산객들을 꽤 괴롭힌다. 아름다운 풍경에 방해꾼으로 등장한다. 풀 뜯는 말들의 행복한 슬픔을 함께 본다. 먼 거리에서 본 풍경은 한가롭고 예쁘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본 모습은 애처롭다. 한쪽 다리가 묶여 불편하게 풀을 뜯는다. 일행들과 알틴아라샨 산장에 도착한다. 산장에서 팔라트카를 꽤 오래 조망한다.
밤이면 은하수가 하늘 별바다를 만든다. 만년설산의 파노라마가 아주 아름답다. 그동안 힘든 고난의 움직임을 보상한다. 경이롭고 신비한 자연의 멋진 선물이다. 우리가 찾은 날 밤엔 별이 사라지고 없다. 고산의 구름이 아주 빠른 속도로 흐른다. 맑은 하늘이 어느새 검은 색으로 바뀐다. 검은 구름에서 한바탕 찬비가 쏟아진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면 많은 걸 느낀다. 사계절 푸른빛의 침엽수림이 울창하다. 별바다 대신 적막한 암흑바다를 보낸다. 함께했던 시간들이 그리움으로 남는다. 언제나 마음 한 쪽에 남아 울컥할 것 같다. 잃어버린 원형이 유지되는 땅이 그립다. 바람 순해진 시간 꿈 없는 잠에 빠져든다. 알틴아라샨 산장에서 첫날밤이 지난다.
산행 거리가 20km 정도여서 걱정이다. 고소도 불안하고 오르막길도 걱정이다. 배낭무게와 체력안배에 가장 신경 쓴다. 해발고도 3800m까지 올라가야 한다. 그런 다음 2600m까지 내려와야 한다. 고산이 처음인 사람은 지옥경험 날이다. 3000m대에 산정호수 아라쿨이 있다. 고소를 견디며 구불구불 산길을 오른다.
ⓒ함우석 주필
알틴아라샨은 천산산맥 서쪽 편에 있다. 고도가 높은 초원의 6월 밤은 서늘하다. 산허리 위로 구름 띠가 마치 산수화 같다. 구름 속에 병풍처럼 펼쳐져 몽환적이다. 시원하고 푸른 풍경을 감상하며 걷는다. 호수 가기 전 보는 아래 협곡도 장관이다. 호수 주위를 고산설산이 길게 둘러싼다. 아라쿨 호수까지 최대한 쉬엄쉬엄 간다.
산길 가는 중 짧지만 빙하구간도 건넌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침엽수가 가득하다.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나무가 도열한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장관을 연출한다. 좀 더 가면 노랑 보라 들꽃들이 지천이다. 그 풍경을 본 것만으로 피로가 사라진다. 예상 못한 많은 비가 자주 날씨를 바꾼다. 일행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한 가득이다.
숨차고 가팔라진 오르막길이 계속된다. 들숨과 날숨을 깊숙이 들이쉬고 내쉰다. 오르다가 쉬고 뒤돌아보기를 반복한다. 호수로 가는 길은 한 폭의 독특한 유화다. 가는 길에 빙하도 보이고 계류도 흐른다. 빙하수 흐르는 계곡이 너무나 아름답다. 야생의 땅에 서니 설산이 눈에 들어온다. 현실감이 별로 없는 산이 햇살에 빛난다.
메랄드빛 장엄한 호수미를 기대한다. 천산산맥이 만들어낸 거대한 계곡미다. 그러나 하늘색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계곡 넘어서 소나기가 기다릴 것만 같다. 한 치 어긋나지 않고 장대비가 쏟아진다. 차갑게 계속되는 많은 비가 길을 막는다. 합체된 두 산 데칼코마니를 못 보게 한다. 고산의 숨 가쁨이 찬비와 함께 엄습한다.
간식 먹고 나니 비가 더 내리기 시작한다. 작은 돌이 뒹구는 오르막길에 다다른다. 모두 말없이 세찬 비바람을 견디며 간다. 아라쿨 호수 가는 길은 꽤 힘든 여정이다. 호수 옆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이 보인다. 경사도가 심하고 돌길이 아주 미끄럽다. 왼쪽 계곡에 숨어 있던 빙하도 드러난다. 빙하물이 흐르는 계곡이 차가워 보인다.
충북일보와 설산
ⓒ함우석 주필
계곡에 올라서 보면 바로 아래가 호수다. 하지만 아라쿨 직전에서 돌아내려간다. 최대한 천천히 한발 한발 옮겨 내려간다. 쉬운 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이 거부하니 도통 어쩔 도리가 없다. 하산은 비로 인해 오르기보다 더 힘들다. 진창으로 변한 길 곳곳이 곧 위험지대다. 밟을 때마다 눈처럼 스르르 미끄러진다.
걷는 내내 어디서든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초지 위를 길 삼아 지그재그로 내려간다. 심호흡하면서 집중하고 집중해 걷는다. 미끄러운 진흙 길을 조심스럽게 걷는다. 길의 중간 중간에 아주 작은 빙하가 있다. 한반도 지형의 작은 얼음덩이가 반갑다. 내려오는 이들을 바라보는 쾌감도 즐긴다. 곧 폭신한 풀밭처럼 마음이 푸근해진다.
계곡 내려가는 길에 비바람이 몰아친다. 길가 돌에 빗물이 흐르니 더욱 미끄럽다. 계곡을 건너는 도하 중 사고는 위험하다. 조심스럽게 두 발을 응시하고 내딛는다. 돌길이 끝나도 좀체 햇살이 들지 않는다. 산장에 가까워지니 침엽수가 가득하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기상이 넘친다. 나무를 바라보니 금방 피로가 사라진다.
마침내 우중의 초록평원을 다시 만난다. 조금 전까지 고생은 이미 기억 저편이다. 숨 가쁘게 걸었던 길은 사라진 지 오래다. 소똥과 말똥을 밟아도 마음이 여유롭다. 오리지널 유목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천연온천 원탕 체험은 잊지 못할 날이다. 두고두고 기억할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사륜구동의 오프로드 체험을 기대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