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로스팅을 어지럽게 하는 요란한 잡음들

2022.10.17 15:54:26

박영순

'커피인문학' 저자

향이 사무치는 가을이다. 길을 걷다가 바람에 실려오는 커피 볶는 향을 맡노라면 스르르 눈이 감긴다. 실크가 볼을 스치는 듯한 부드러움과 솜 베개를 품은 듯 포근함도 가득하다. 커피 향만으로도 이토록 정서가 넘쳐 흐른다.

커피 볶는 일을 어렵게 생각할 게 아니다. 프라이팬이나 냄비에 검은콩을 볶는 것과 다르지 않다. 톡톡 소리가 나면 "거의 다 볶였구나"하고 불을 줄이면서 소리의 기세가 잦아지는 지점에서 배출하면 드립 커피로 즐기기에 적절하다. 다만 타거나 덜 익지 않게 나무 주걱으로 젓거나 흔들며 불에서 멀리하고 가깝게 하는 정도를 경험으로 익혀야 한다.

커피 볶는 것을 밥 짓듯 해도 좋다. 압력밥솥에 밥을 할 때 온도계를 여러 개 꽂고 온도를 재고 그래프를 그려가며 따라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수증기가 올라오는 소리가 나고 누룽지 냄새가 비치는 듯하면 불을 줄이다가 끈다. 이렇게 몇 번 해보면 밥을 설익거나 태우지 않는 범위를 포착할 수 있다. 커피 볶는 일도 같은 과정을 거치며 깨우칠 수 있다. 수분율과 밀도를 잰다고 하지만 사실 커피 생두마다 볶는 방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커피를 잘 볶는 비결은 로스팅 시간을 얼마나 짧게 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불과 만나는 시간이 길면 향미의 손실이 커지기 때문이다. 불을 세게 하면 빨리 볶을 수 있지만 겉이 타거나 속이 덜 익기 쉽다. 적절한 범위를 찾는 것을 고가 장비의 그래프 따위에 의존하지 말고 반복해 볶으면서 몸짓으로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인간의 감각을 기계가 따라올 수 없다. 항간에 떠도는 현란한 말 탓에 댐퍼와 열량을 수십 번 조절해야 제대로 맛이 발현되는 것으로 믿기 쉬운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1개면 족할 온도계를 4~5개 로스터기에 꽂아 두고는 요란하게 '알오알(ROR)' '델타티(△T)' '디티알(DTR)' 등을 언급하며 미사일을 추적하듯 지표들을 순간 조정해 나가야 맛이 좋아진다고 믿게 만드는 것은 잡음일 뿐이다. 혹, 그 말에 "어렵게 볶으려 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문하세요"라거나 "로스팅 강좌에 등록하세요"라는 기미가 비치기라도 한다면 씁쓸한 상술이 아닐 수 없다.

로스팅을 하면서 만들어지는 그래프의 모양에 따라 커피 맛이 달라지는 게 아니다. "그래프가 같더라도 커피 맛은 달라질 수 있다"는 그들의 모순된 말이 반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래프의 의미는 무엇인가?

로스팅 프로파일을 나타내는 그래프는 단지 어떻게 볶았는지를 시간과 온도의 함수로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볶인 커피를 맛을 봐야 비로소 결과를 알 수 있다. 탄 맛이나 덜 익은 면모가 감지될 때, 다음 로스팅에 이를 개선하기 위해 어느 지점을 어떻게 수정할 지를 결정하는데 참고하는 자료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커피 로스팅은 우리의 감각이 이끄는 것이다. 로스팅이 주는 인문학적 교훈은 "나의 감각을 믿으라"는 명령어로 귀결된다. 로스팅의 핵심은 결과물을 맛으로 평가해서 로스팅 과정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개선하는 관능의 영역에 있다.

좋은 로스터가 되려면 좋은 생두를 알아보는 자질을 키워야 한다. 생김새로 결점을 골라내는 시력이 아니라, 생쌀처럼 산지에서 생두의 등급을 매기는 커핑(Cupping) 실력이 아니라, 한 잔에 담기는 완성된 커피의 진면목을 맛으로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자질을 갖춘 커피테이스터(Coffee Taster)가 훌륭한 커피로스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커피를 볶는다는 것은 커피의 본질인 맛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영역임에 틀림없다. 그래프에서 맛이 생긴다고 믿는 마음에서 어찌 그윽한 커피 향미가 피어오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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