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리꽃 비밀번호

2022.09.27 17:34:21

조우연

시인

곧 시월이다. 쑥부쟁이, 구절초, 고마리 등 시월의 꽃이 피어나고 있지만, 시월은 왜 그런지 자꾸만 물이 빠지고 보풀이 이는 것만 같다. 날아가는 부전나비 날갯짓이 떨어지는 낙엽처럼 쓸쓸하다.

어제는 길을 걷다가 가을 씀바귀를 보았다. 봄에 피었던 씀바귀꽃과 같은 꽃인데도 가을의 씀바귀꽃은 누르스름한 것이, 대궁도 가느댕댕한 것이 바람에 더 자주 휘청이는 것처럼 보인다. 잎도 더 얇고 길다. 따가운 가을 햇살아래 하얘지는 흰 빨래들처럼 투명해지는 시월이다.

비밀번호

보도 볼록 틈에서 피어난

씀바귀 한 송이가

비밀번호일 순 없나

wy3562!! 같은

아라비아 숫자와

영어 소문자와 특수기호로 조합된

비밀번호가 아니라

납작한 굴참나무 그늘과

개미 한 마리와

개미에게 끌려가는 죽은 잠자리의 영혼으로 조합된

비밀번호로 변경해서

공인인증서를 받고

송금을 하고 대출을 받고

증명서를 떼면 안 되나

자꾸 잊어버려

5회 비밀번호 오류에 걸릴 일 없이

양은 숟가락을 쥔 손들이

시장 보리밥집에 모여 탁주를 들 때

훤한 대낮, 잔속에 뜬 웬 보름달로

국세청 홈페이지를 로그인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고마리 수풀 가슴 언저리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 이 울음을

엄마를 기억하기 위한 비밀번호로 설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구멍 난 시엽지에 쓴 연시 한 구절로 내가

추가 인증 없이 언제든

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듯이



많이 익숙해졌지만 인터넷으로 접속할 때마다 인증 받는 일이 아직도 힘들 때가 있다. 내가 맞아, 라고 아무리 말해도 자꾸만 너가 맞냐, 고 여러 번 검증을 거쳐야 접속을 허락하는 많은 절차들이 버겁다. 개인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하려 하면서도 가끔 속이 뒤집힌다.

자주 내가 설정해 놓은 비밀번호를 잊는 경우도 많다. 겨우 설정해 놓으면 노출위험이 있으니 재설정하라고 해서 변경했다가 또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가을 씀바귀꽃과 고마리꽃을 보다가 문득 이런 예쁜 가을 들꽃이 비밀번호가 될 수는 없나 하는 생각에 쓴 시이다. 어려운 비밀번호 대신 친근하고 다정한 가을꽃 한 송이를 들고 저예요, 하고 접속을 하면 어서 오세요, 하며 냉큼 로그인을 시켜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이다.

굴참나무 아래서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잠자리 날개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마치 꼭 돛대를 들고 바람에 이리 저리 방향을 틀며 항해하는 검은 돛배처럼 보였다. 가을과 함께 저 작은 돛배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 찬바람에 죽음을 맞이한 잠자리의 영혼은 개미를 따스한 겨울로 데려가는 비밀번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가을 물가에 피는 고마리꽃을 보면 어렸을 적에 덮고 자던 이불 생각이 난다. 아랫목 온기를 찾던 식구들의 찬 발들이 모여 북적이던 이불 속. 이불에는 고마리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새벽 찬바람이 묻어있던 어머니의 몸뻬 바지에도 고마리꽃이 가득했다. 고마리꽃을 보면 어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가 떠오르고 어머니의 냄새가 떠오르고 어머니의 음식이 떠오른다. 고마리꽃은 어머니에게 접속하는 비밀번호다.

탁주에 떠오른 보름달을 본 적이 있다. 누런 알루미늄 주배에 흰 탁주를 한가득 따라 보면 그것이 꼭 만월(滿月) 같다. 시장 골목 귀퉁이 선술집에 앉아 낮술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가 사는 것이 퍽퍽한 사람들인데 그들도 세상살이를 살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비밀번호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비밀번호를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 다가가기 위한 혹은 누구를 기억하기 위한 비밀번호. 결코 잊지 않기 위한 혹은 아주 가끔씩만 들춰보고 싶은 그 무엇을 위해 자기만의 비밀번호. 나만의 비밀번호로 쑥부쟁이, 산국 같은 시월의 작은 들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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