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 보물찾기

2022.09.25 15:46:05

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손주들 돌보러 출발하려던 아내(이제는 內眷이라 부르고 있다)가 냉장고 앞으로 오라 부른다. 현직에 있을 때 고생을 많이 했으므로 퇴임 후에도 매 끼니를 해 주겠다 공언한 내권께서 냉장고에 먹을 것을 넣어두었으니 끼니때마다 잊지 말고 잘 찾아 먹으라는 지시이다. 그간 행색을 보니 자기가 없으면 외식으로 때우는 남편이 아마도 목불인견이었으리라. 이야말로 고마운 배려이고 따스한 사랑인데 자주 열지 않는 냉장고는 요지경 속의 하나라 정작 밥때가 되어 열면 머리가 하얘지고 만다. 냉장칸과 냉동칸이 분리된 데다가 각 층으로 칸이 나뉘어 한치의 빈 곳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 없이 음식이 꽉 들어차 있다. 분명히 두 번째 칸에 있다던 음식은 보이지 않고 시래기 삶은 것처럼 금방 꺼내 먹을 수 없는 것들만 눈에 띈다. 몇 번 위아래 칸을 뒤지며 찾는 시도를 해 본다만 점차 끓어오르는 화 때문에 냉장고 속에 쟁여둔 음식들을 몽땅 밖으로 끌어내어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조차 들게 된다. 문을 열었다가 차라리 다른 것으로 속을 마무리 하는 모양이 컴맹이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추진하는 것과 매한가지로 초조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모양새인데 남자에게 냉장고 속 음식을 찾으라는 결과이다.

먹을 것 찾기가 가히 보물찾기 수준이요, 오리무중의 길에서 목적지 찾기로 변해 버렸다. 문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껏 각종 보물찾기에서 성공한 적이 별반 없다는 거다. 축제의 경품에서도 당첨된 적은 더 없는지라 보물찾기도 옆 사람 상품 타는 것도 남의 일처럼 지나치는데 정작 당면한 냉장고 속 음식 찾기가 보물찾기와 비슷해지니 더 불안하다.

그런데 정작 內眷도 이따금 냉장고를 열고는 혼잣말로 '이게 왜 여기 있지?'라거나 '이걸 내가 어디에 넣었더라' 하며 중얼거리니 냉장고로 헷갈리는 남편과 진배없는 행동을 한다. 저러다 종당에는 냉장고 속에서 휴대전화기를 찾게 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지만 그래도 전문가인 안주인이라도 냉장고는 미로 같은가 보다. 살림이 복잡해질수록 냉장고의 수도 늘어가서 여염집도 김치 냉장고를 포함하면 두서너 대가 넘고, 접빈객에 골몰하는 종택 같은 경우에는 상업용 대형 냉장고가 열두어 개를 상회하니 宗婦는 머리가 비상해야 손님에게 내놓을 음식을 제대로 찾을 수 있겠던데 여느 아낙도 머리가 좋아야 냉장고를 제대로 운용하겠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릴 때 다른 나라처럼 사재기도 안 하고 매점매석을 안 한 배경에는 택배 시스템의 발달과 더불어 시어머니의 관심으로 차곡차곡 쌓인 냉장고 때문이란다. 그동안 켜켜이 쟁여두었던 음식을 꺼내 처리하는 동안 코로나의 위험이 스러졌고 더불어 냉장고도 비울 수 있었다는 것 아닌가.

우리 냉장고는 이따금 딸들 덕에 비워진다. 두 딸이 와서는 냉장고의 오래된 음식을 버리거나 조리하느라 치우고, 장모님 닮아 자식에게 지극정성인 에미가 딸에게 싸 주려 비우기 때문에 아이들이 간 뒤면 그나마 잠시 냉장고 안이 여유롭다. 장모님 나이 드신 뒤에 세 딸이 번갈아 처가 냉장고를 정리하더니 이제는 우리 냉장고가 딸들 덕에 비워진다. 그렇게 인생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살림에 관심이 있으면 공부에 열중한 학자가 서가의 책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냉장고 속도 환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요즘은 내용물을 잘 살피고 냉장고에 보관도 쉽도록 속이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가 나오던데 미숙한 남자에게는 역시 어려운 일이다.

나이 드신 어머님은 너도 이제 부엌살림에 신경을 쓰라 하시고 주부습진으로 병원 치료를 받는 남편도 주변에 보이지만,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듯싶다. 그렇다고 필요하지도 않은데 수시 문 열어 내용물을 점검할 수도 없고, 이따금 문을 열면서 물어 봤자 모진 잔소리가 돌아올테니 냉장고 때문에 속 터지는 남자들 참 많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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