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커피에도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진다. 여러 향미를 피워내는 커피가 그 숫자만큼이나 다채로운 색상을 떠오르게 하는 까닭이다.
에티오피아 구지존의 함벨라 지역에 있는 하루 농장의 내추럴 커피를 한 모금 머금을 때면 마음 속에서 가을이 시작된다. 잘 익은 살구가 떠오르면서 주변은 온통 연한 노란빛을 띤 진분홍색으로 물든다. 은은하고 우아한 향에 시럽처럼 부드러운 촉감이 더해지면 머리 속 공간의 중심은 어느새 말린 살구 속을 농밀하게 채우는 진한 갈색톤으로 채워진다.
커피로 입안의 점막을 골고루 적신 뒤 목 뒤로 넘길 찰나, 녹색 망고의 생동감과 날 선 산미가 섬광처럼 빛났다가 사라진다. 그린(green)이 주는 싱그러움이 하루 커피의 신선함을 자랑하는 듯하다. 활달한 산미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내추럴 커피의 마른 향미에 신선한 바닷바람을 일으켜준다.
사유(思惟)는 커피를 삼킨 뒤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식도로 넘어간 커피의 향기들이 기도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 후각을 자극한다. 이 비후 경로(retronasal route)를 통해 감지되는 맛들은 단풍의 절정을 알리는 동시에 '낙엽의 시기'가 다가옴을 알려준다.
오크 숙성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으로 치면, 원래 포도에서 비롯된 블랙 커런트가 향미의 골격을 꽉 붙잡아주었다가 점차 양조과정에서 발생하는 초콜릿과 캐러멜의 향이 풍기며 긴장을 풀어주는 것과 유사하다. 이어 와인을 목 뒤로 넘기고 가만히 또다른 향미를 찾아가도 보면 병 숙성 과정에서 부여되는 '낙엽의 향기'가 퍼지기 시작한다. 와인도 우리의 관능 속에서 단풍 들고 낙엽 진다.
한 잔의 커피가 다양한 색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다양한 향미 속성 때문이다. 장미향이 감지될 때 빨간색이, 레몬이 느껴질 때 노란 빛이, 메이플 시럽이 혀에 감기는 듯할 때 갈색이, 민트의 화함이 풍기면 연녹색이 각각 그려지는 것은 진화의 산물이다. 자연에서 살아오면서 보아 온 색들이 속성과 함께 DNA에 새겨진 덕분이다.
그러나 커피를 삼키고 사유할 때, 떠오르는 색은 좀 다르다. 특정 속성에 대한 단순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커피를 머금어 삼킬 때까지 감지하고 느꼈던 속성과 색을 종합해 감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여기서 지혜가 만들어진다.
하나의 속성을 단순히 반복(repetition)해 감지하는데 사유가 필요하지 않다. 하나의 속성이 어떻게 변형(transformation)하고 발전(recursion)하는지에 집중하는 가운데 지혜가 생긴다. 하루 커피가 이끄는 색상이 살구색에서 그린을 거쳐 노랗고 붉은 색조와 진한 갈색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생각이 바로 지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어찌 보면, 자연 전체가 변형 발전한다. 단순해 보이는 단풍도 그렇다. 본래 모든 속성은 이미 그 안에 원인을 안고 있다. 겨울로 접어들어 나무가 빨아들이는 물이 부족해지면 잎으로 가는 관이 좁아지고 엽록소는 사라져 그 아래에 감춰져 있던 노란 빛의 카로티오이드가 두드러진다. 잎에서 만들어진 포도당이 나무로 흡수되지 못하면 그 자리에 붉은 색을 과시하는 안토시아닌이 형성된다. 마지막까지 분해되지 않고 잎이 떨어질 때까지 남아 있는 색소가 타닌이다. 따라서 낙엽은 거무튀튀한 진한 갈색을 띠게 된다.
한 잔의 커피도 가벼운 향들이 날아가버리거나 물에 분해되고 나면 타닌과 같은 무거운 알칼로이드 계열의 물질이 남아 입안을 무겁게 눌러준다. 마치 가만이 앉아 생각에 빠지라는 신호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