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순
커피비평가협회(CCA) 회장/커피인문학 저자
광복 76돌을 즈음해 들려온 반가운 소식 덕분에 휴일을 깊은 사유 속에 보냈다.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이 일본을 제치고, 더욱이 11단계나 차이를 벌렸다는 뉴스를 접한 순간, 사실 믿기지 않았다. 조목조목 내용을 뜯어보니 거시경제 지표인 명목 GDP와 기술경쟁력은 일본의 우위가 여전했다. 하지만 물가와 환율을 반영한 국민 1인당 구매력과 제조업 경쟁력은 일본을 추월했다. 최근 30년의 자료를 토대로 그래프를 그려보면 일본을 역전시키는 분야는 속속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일제에게 36년간 착취당하고도 수탈의 장본인을 제친 것은 세계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 이 점을 다짐하듯 되뇌면서, 소식을 접한 순간 믿을 수 없다고 반응한 나의 태도를 반성했다. 일제강점기를 겪지도 않았으면서도 지레 일본을 추월하기 힘든 존재로 간주했던 잠재의식을 스스로 통렬하게 채찍질했다.
오랜 동안 묶어 키운 개의 꼴로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는 패배감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깨어 나야 한다. 묶여 있던 줄이 풀렸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각자의 영역을 되짚어봐야 한다.
커피 분야에서는 국제자격증이라는 상술에 홀린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바리스타를 고용하는 카페는 물론 커피 강사를 채용하는 공공기관조차 전문성을 입증하는 지표로서 국제자격증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더욱 부당하다. 이유는 이렇다.
첫째. '국제커피자격증'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미국이나 영국, 이탈리아에서 발행하는 '외국민간자격증'일 뿐이다. 해당국의 정부나 국가기관이 관여한 듯 수작을 부리기도 하지만 모두 거짓이다. 민간협회의 수익사업일 뿐, 그 자격증이 있으면 세계적으로 바리스타로 취업할 수 있는 효용성을 갖지도 못한다. 개인적으로 전문가임을 자부하는 위로가 될 뿐이다.
둘째, 바리스타가 국가자격증이 되면 외국민간자격증은 모두 사라질 거품이다. 제과, 제빵, 조주기능, 네일 아트 등 국자자격증이 있는 분야는 외국자격증을 따려고 매년 수억 원을 해외에 빼앗기는 일들이 결코 벌어지지 않고 있다. 당국이 외국커피자격증 시장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많은 돈이 유출되는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돈은 전부 예비 바리스타의 눈물이다.
셋째, 수백만을 주고 외국민간자격증을 따지만 교육 내용이 별다를 게 없다. 외국민간자격증 과정도 국내 자격증 과정을 운영하는 강사들이 맡는다. 더욱이 외국민간협회는 강사들을 상대로도 장사를 한다. 이른바 '자격증 과정 개설권'이라고 해서 수백만 원을 받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갱신을 요구하며 돈을 또 받아 간다.
결국 '외제'라면 '국산'보다 우수하다는 고정관념이 이러한 불행의 굴레를 낳고 있다. 흔히 동물에게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 목격된다. 줄을 풀어줘도 멀리 나가지 못하는 현상이다. 바리스타 세계챔피언을 배출할 정도로 수준이 오른 한국 커피의 위상을 우리 스스로 알지 못하는 듯하다. 심리학자 버나드 웨이너는 "학습된 무기력은 우울증을 초래한다"고 경고했다. 더 늦기 전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국가자격증으로 지정해서라도 외국민간자격증에 의지해 권위를 가지려는 구태를 끊어야 한다. 적어도 공공기관이 외국민간자격증을 커피전문성의 잣대로 삼으려는 행동을 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