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순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커피학과 외래교수
'사유하는 커피'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커피 향미를 화두로 삼아 정진하기를 원한다. 향미의 근원을 쫓아가다 보면, 감각은 사라지고 생각만 남아 마음 깊이 의심이 곧잘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커피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커피를 마실 때 와인처럼 어떤 향미가 들어 있는지, 그것들이 어떤 느낌을 들게 하는지에 집중하는 음용 방식을 '사유하는 커피'라고 부르며 존중한다. 커피의 산지와 품종을 구별해 소비하는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확산되면서, 이렇게 자신의 몸과 마음이 커피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묵지 않고 썩지 않은 신선한 커피들은 마시는 사람의 관능을 자극하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솜사탕과 같은 단맛, 과일을 떠올리게 하는 산미, 견과류의 고소함, 초콜릿을 연상케 하는 부드러운 쓴맛이 어느 한 구석 모나지 않게 균형을 이루며 한데 어우러지면서 깊은 생각에 젖어들도록 도와준다. 커피로 명상을 갈구하는 사람들은 커피의 향미가 떠올려주는 이미지와 과거의 한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커피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먼 옛날 에티오피아 부족이 주술사의 영혼은 커피나무에 깃든다고 믿었고, 고행을 통해 신을 만나기를 갈망했던 이슬람 수피교도들은 커피를 기도의 도구로 삼았다. 금욕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몸을 극한의 상태로 몰고 가야 비로소 생각만 남기고 모든 감각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커피는 잠을 쫓고 정신을 또렷하게 만드는 역할로 수행자를 신에게 안내했다. 선종(禪宗)을 일으킨 달마대사가 커피를 만났다면 눈꺼풀을 잘라버리는 고통을 겪지 않았을 지 모른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보다 150년 앞서 이 땅에 오셔서 진실을 깨우쳐 주신 석가모니를 불기 2565년에 즈음해 사모하는 방법 중 하나가 '커피로 사유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싯다르타보다 300년 앞선 다윗시절에 커피가 전쟁을 막았고, 그의 아들 솔로몬때엔 에티오피아 초대 국왕을 탄생시키는데 커피가 역할을 했다. 구전을 그대로 받아들여 인류 최초 해탈의 현장에도 커피가 놓여 있는 유쾌한 상상을 해본다. 커피의 본성은 고행자들의 깨달음을 향한다. 커피의 가치는 잔에 담겨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몸에서 일으키는 변화의 중심에 있다.
덩그러니 놓인 한 잔의 커피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커피는 관능의 구석구석을 일깨우다가 목을 타고 내려갈 즈음 마침내 나의 일부가 될 것이다. 잔에 든 커피는 현에 묶여 있는 활과 같다. 겉보기엔 고요하지만 농축된 에너지들을 품고 있다. 이것들은 내 몸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의 곳곳에 스며들어 나를 변화시킬 것이다.
커피의 본질은 마시는 자의 정서(emotion)에 있다. 불가에 "달을 보라고 하는데, 왜 손가락을 보느냐"는 말씀이 있다. 커피를 마시는 자세를 올바르게 하는데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말씀이다. 커피의 향미를 깨우치려는 길에서 전문가를 자칭하는 사람들의 장황한 설명은 되레 방해가 된다. 향미의 다양한 속성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커피 자리를 끝내서는 안 된다. 커피를 마신 뒤 남는 생각을 쫓아가야 한다. 전문가의 화려한 묘사에만 집중하는 것은 달이 아니라 손가락에 매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커피를 알고자 한다면 '모른 채 체험'해야 한다. 잡음이 많은 가운데 커피를 마시면 사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의심'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단순히 맛에 집착할 게 아니라 반응하는 나를 따라 가야 한다.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냐 없냐를 따지지 말고, 선사께서 '無(없다)'라고 말씀하신 연유를 화두로 삼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