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月愛

2021.04.13 17:19:18

김규완

전 충청북도 중앙도서관장

오수를 즐기던 자목련 한 송이가

살랑 봄바람에 '툭' 떨어진다.

뒷짐지고 한 발 한 발 걷던 여인이 허리를 굽힌다.

치렁치렁 검은 머리를 빼면 온통 분홍이다.

분홍 투피스 니트에 분홍 롱가디건 니트를 걸치고 분홍 신발을 신었다.

슬링 백 슈즈 덕에 발뒤꿈치가 도드라져 더 늘씬해 보이고 영산홍 봉오리같은 알종아리는 건강미가 물씬하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며 뛰었던 워즈워드의 가슴처럼 내 가슴도 뛰었다.

"엄마!"

아이가 달려가 안기는 것을 보니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 같다.

'분석하는 것은 전체를 망쳐 버린다.

조각조각을 보면 신비는 사라지고 만다.

돌아보지 말자!'

창밖에 커다란 미스김라일락이 있는 도서관에는 친절한 미시즈김이 있다.

4월의 그녀는 봄물 오른 가지처럼 싱그럽고 연보라의 라벤더 향이 느껴진다.

열여덟 고등학생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이 있었다.

내가 얹혀살던 집은 수동 달동네에 있었고

그녀의 집은 4km 떨어진 탑동 고개 너머에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시간이 나는 저녁에 그녀의 집을 찾았다.

갈 때는 뛰어가고 올 때는 걸어왔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따듯한 어머님이 계셔서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돌아올 때는 가면서 먹으라고 과일과 옥수수 등을 챙겨 주셨다.

서로의 주장이 강하여 날이 저물었던 어느 봄날,

고갯마루 과수원에는 하얀 천막을 이어 친 듯 배꽃이 만발했다.

별빛밖에 없는 그믐밤의 배꽃은 허허벌판 희디흰 눈처럼 나를 홀렸다.

주머니 속에 그녀가 넣어준 초콜릿이 있는 것도 잊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T.S.엘리엇 시 <황무지> 중에서

5월에는 5월을 찬양하고 6월에는 6월을 찬미하겠지만

지금의 4월을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자목련, 라일락, 복숭아꽃, 영산홍, 박태기나무꽃이 붉게 피는 수줍은 4월, 하얀 배꽃이 한밤에 다가오는 4월은 좋다.

"안녕하세요·"

진분홍 스커트를 입은 숏커트 여인이 지나가며 인사를 한다.

새싹처럼 아름다운 4월의 여인들이 사는 이 동네를 떠나기가 더더욱 싫어진다.

'지금은 젊은 여자에게 이야기하기도 편해졌다.

설사 말이 탈선을 하더라도 늙은이의 주책으로 돌릴 것이다.

저편에서도 마음 놓고 나를 사귈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선생님 뵙고 싶은 때가 많습니다"하는 편지가 자유롭게 우리집 주소로 날아오기도 한다.'

-피천득 수필 <송년> 중에서

101세 김형석 교수는 "사랑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

영문학자 피천득은 자목련 같고 철학자 김형석은 백목련 같다.

4월엔 4월의 멋이 있듯 나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나만의 사랑이 있다.

신체보다는 정신이기에 잘생긴 여자보다는 착한 여인이 더 좋다.

사랑만큼 멋지고 건강한 게 또 있을까·

좋은 생각과 사랑스런 마음을 가지고,

게으름피우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여행하고 사랑하자.

정념(情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정인(情人)도 만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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