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인문학 - 평화로운 모습 속 삶과 죽음 '바라나시'

떠나는 자도 남는 자도 후회가 없어 보인다

2021.03.01 16:09:42

안소현

정치학 박사 / 지역문화커뮤니티 '함께' 대표

사부작사부작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뭇잎에 햇빛이 쏟아지면 연초록으로 돋아난 여린 잎들이 햇빛을 오선지로 삼아 춤추듯이 악보를 그려대겠지.

어느 해 봄날, 신항서원 잔디밭에서 시민들에게 '바라나시'라는 인도 영화를 상영한다고 했다. 인도 영화 특유의 마살라(춤과 노래가 톡톡 쏘는 향신료 같다는 데서 유래)장르일 거고 해피엔딩일거라고 확신했다.

마침 부친상을 당한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바람도 좋고 기분도 풀어 줄 겸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장르가 코미디일 테니까 우울함을 떨쳐 줄 심산이었다. 풀밭 위에 돗자리를 펴고 주최 측에서 준비한 간단한 과일과 바게트와 따뜻한 차를 세팅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나시로 여행할 채비를 했다.

몇 해 전에 다녀온 바라나시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릭샤를 태워 주던 청년의 새까만 발. 길가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 덩치 큰 흰 소들의 행렬. 갠지스강의 진흙 같은 물빛. 그 물에 몸을 씻는 사람들. 멀리 보이는 사원과 호텔들. 그리고 불꽃과 연기로 가득한 화장터. 갠지스 강에 소원을 빌며 띄운 꽃 디아. 아침마다 길에서 파는 짜이. 기타 등등.
◇인도인에게 바라나시란

산스크리트어로 '신성한 물을 차지한다'는 뜻을 가진 바라나시는 바라나 강과 아시 강이 합쳐진다 해서 붙여진 갠지스강 연안에 위치한 힌두교 최대의 성지이다. 시크교, 자이나교, 불교에서도 성지로 꼽고 있다. 싯다르타가 처음으로 설법을 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갠지스강 유역에는 종교적인 정화를 위해 목욕을 할 수 있는 5㎞의 가트(목욕계단)가 있다. 인도 사람들은 전생과 이 생에서 쌓은 죄를 씻기 위해서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는 의식을 치르기를 소원하고 어떤 가트는 화장터 역할을 해서 시신을 태운다. 신앙심이 깊은 인도인들은 누구나 일생에 한번 바라나시를 방문하여 그 길을 걸어보고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하므로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며 수많은 사원이 있다.

인도인들의 평생소원은 '인생에 한 번이라도 갠지스강에 가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바라나시는 '인도인들의 영혼의 고향'이자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가야 할 여행지이다.

바라나시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영화 '바라나시'

밤마다 같은 꿈을 꾸는 77세 다야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가족들에게 바라나시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다야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바라나시로 떠나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일 밖에 모르는 아들 라지브는 일 때문에 아버지와의 바라나시 여행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의견 차이에도 여행을 고집하는 아버지를 혼자 보낼 수 없어서 아들 라지브는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함께 도착한 숙소는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바라나시 갠지스강에 위치한 샐베이션(salvation·구원)호텔이었다. 샐베이션 호텔은 15일만 머무를 수 있는 이상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좁고 청결하지 못한 방을 배정받고 고집불통 아버지와 일중독 아들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15일 안에 죽으면 된다는 호텔 지배인의 설명으로 시작된 샐베이션 호텔에서의 동거는 그동안 함께 하지 못한 부자간의 경험과 추억을 쌓게 만든다.
◇다야와 라지브

다야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죽음을 준비하려는 반면에 아들 라지브는 밀린 일 때문에 점점 초조해진다. 어느 날 갠지스강을 배경으로 나눈 다야와 라지브의 대화는 다시 태어나면 무엇으로 태어날까· 라는 질문을 던져준다. 주머니를 가진 캥거루로 태어나고 싶다는 다야의 대답에 깔깔 웃는 부자. 그토록 자신에게만 엄격했던 아버지와 처음으로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들이 요리한 맛없는 요리, 불량식품 먹어보기, 바라나시의 간식 '라씨', 노을이 지는 가트에서의 대화와 웃음, 아버지를 안마하는 아들, 불편했던 부자는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고 샐베이션호텔의 생활에 익숙해진다.

◇새로운 설레임, 빔라

셀베이션호텔에서 남편과 사별 후에도 18년 동안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여인 빔라와 만나게 된다. 빔라는 다야에게 바라나시 구석구석을 안내하면서 두 사람은 더욱 친해진다. 몸살로 침대에 누워있는 다야에게 "정말로 가시는 줄 알고 질투도 났어요."라고 말하는 빔라의 대화 속에서 죽음을 구원이라고 믿는 인도인의 마음이 느껴졌다.

샐베이션호텔의 오랜 생활이 죽음에 대한 기다림이라고 생각하니 의외였지만 그 대사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빔라와의 행복한 만남은 죽음을 준비하는 다야에게 새로운 설렘을 주고 두 남자 사이에서 관계를 돈독하게 해 주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해 낸다. 다야와 함께 드라마를 보고 라지브에게는 요리법을 알려준다. 그러나 밝고 어여쁜 여인 빔라도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은 역시 예고 없이 찾아든다. 다야는 빔라를 담담한 표정으로 떠나보낸다.

◇다야와 라지브와 손녀 수니타의 '세대 간 소통'

25세의 수니타의 결혼을 부추기는 아들 라지브에게 스스로 결정하게 기회를 주라는 할아버지 다야의 말에 라지브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수니타에게 솔직한 심정을 물어 본 라지브와 아내는 딸이 취직했고 결혼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자 파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지만, 할아버지 다야의 도움으로 수니타에게 결혼 보다 일을 선택하게 허락한다. 25세의 손녀, 52세의 아들, 77세의 할아버지가 세대 간의 차이를 부드럽게 풀어가는 전개 방식이 참 인상적이었다. 다야의 오토바이 처리 문제를 고민하는 아들에게 다야는 손녀 수니타에게 물려주라고 한다.

'수니타는 여자이고 오토바이를 못 타는데요·'

그럴 줄 알고 손녀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을 진작에 가르쳤다는 다야.

사소하지만 흐믓한 부분이다.

◇스크린에 비춰진 바라나시

인도만의 색감, 인도인의 삶을 느낄 수 있는 바라나시의 좁은 골목들과 갠지스 강가 옆 좁은 골목들은 인도인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갠지스강 옆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지나면 재래시장과 상점가들이 등장하는데, 인도 특유의 강렬하고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미술 공예품, 나무 장신구, 상아와 놋쇠, 비단 등의 특산품, 신선한 과일과 채소, 길거리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을 보며 바라나시를 다시 여행하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힌두교 순례자들은 매일 일출과 일몰 시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인 '뿌자'를 드리기 위해 강가로 모인다. 성스럽게 의식을 행하는 힌두교인들은 꽃불인 '디아'를 강가에 띄워 소원을 빈다. 라지브의 가족들은 함께 보트를 타고 뿌자 의식을 관람한다. 꽃불을 강에 띄우고 강가의 신에게 소원을 비는 이들의 모습은 다시 한 번 바라나시를 여행하는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다야의 죽음

15일 동안만 허락되는 호텔 예약은 또 다시 다른 이름을 대면 15일을 연장할 수 있다. 라지브가 일에 대한 걱정으로 잠시 집에 다니러 간 사이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고 가족들은 모두 바라나시로 향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했던 가족들은 바라나시로 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바라나시로의 여행을 만류했지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셀베이션호텔에서 가족과의 불협화음을 자연스럽게 해결하고 생을 마감한 77세의 고집불통 다야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자식에게 엄해야만 했던 우리들의 아버지. 그래서 가족들과 따뜻한 포옹조차 못했던 우리들의 외로운 아버지 마음이 읽혀져서 가슴속에 소리 없이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에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아마 다야는 한 마리 새로 환생한 것 같다.
감독 슈브하쉬쉬 부티아니는 케랄라에서 바라나시까지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바라나시에서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다는 호텔에 대해 듣게 되었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바라나시로 여행을 온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많은 질문과 숙고의 시간 끝에 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에서 모든 세대가 살면서 많은 이유로 갈등한다. 내적 갈등을 거듭하는 가운데 그들은 결국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종교적으로 구원이라는 단어는 '묵티(Mukti·해탈)'를 의미한다고 한다. '구원'이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며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사람들이 빚이 없다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할 수 있으며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 등장한 25세, 52세, 77세의 사람에게 구원은 서로 다른 의미였을지 모른다. 이 영화를 통해 모든 세대에게 있어서 자유는 그들 삶의 시점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5세 수니타에게는 결혼과 여성다움으로부터의 자유, 52세 라지브에게는 일과 가족에 대한 부담으로 부터의 자유, 77세 다야에게는 삶의 고통과 엄한 아버지로 부터의 자유와 해탈을 주는 다양한 경험이었다.

만약에 우리에게도 죽음을 준비하는 여행이 있다면 참 의미 있을 것이다.

살면서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했거나 의도하지 않은 아픔을 주었거나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남길 시간이 주어진다면 남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온과 위로를 받을 것이다. 가는 사람 또한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주인공처럼 마음에 담은 서운함과 미안함을 해소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따뜻한 포옹을 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축복 일 것이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가 돌아오는 길에 울음을 터뜨렸다. 코로나 때문에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의 면회가 두 달째 금지되어 아버지와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해 보고 장례를 치러드렸다고 흐느꼈다. 얼마나 애간장이 타들어갔을까. 이 영화를 보며 자식과 마지막을 준비하는 주인공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심장을 도려내어 그 안으로 바람이 싸늘하게 스쳐 지나가는 느낌을 감지했었다. 심장에 구멍이 뚫린 기분이었다. 우리 문화에서 죽음은 이별이자 고통이고 마음의 빚인 것이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에 그 친구의 어깨를 쓸어주면서 '그래. 실컷 울어. 그리고 새가 되어 하늘로 훨훨 날아가시라고 기도하자.'

소중한 사람을 보내는 마음과 소중한 사람을 떠나는 마음이 더 이상 빚이 되지 않길 바라며 가족과 함께 죽음을 준비하는 여행을 떠나는 인도의 풍습이 참 의미 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감독은 대사 보다 표정이나 몸짓으로 많은 메시지를 주려고 노력했다.

영화는 코미디 장르로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풀어가고 있지만 결코 경박스럽지 않다.

바라나시를 보지 않았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고 바라나시를 보았다면 인도를 모두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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