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2021.02.23 17:20:20

정성우

청주 단재초 교사

"제는 아직도 보리를 먹네!" 점심에 도시락 뚜껑을 열면 몇 년 묵은 정부미 사이에 낀 보리쌀이 얼굴을 내민다. 반찬통에 담긴 김치보다 그 보리밥을 통해 집 사정이 드러나는 것이 창피했다. 개천에서 태어났으니 용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물려받은 기억력도 내세울 것 없었다. 성실한 노력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전부였다. 돈도 많고 머리가 좋은 놈은 과외까지 하면서 공부하지만, 그런저런 머리로 혼자 공부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공부를 즐겁게 한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가난하다는 것 못지않게 머리가 나쁘다는 것도 창피한 노릇이다. 시험 당일이면 전날까지 얼마나 공부를 하지 않았는지를 서로 자랑했다. 시험 결과가 동일할 경우 더 적게 공부한 사람이 더 똑똑한 놈이 된다. 새벽을 넘겼어도 자정 전에 잠을 잤다고 말했다. 가난한 놈이라는 소리는 참을 수 있어도 미련한 놈이라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가난이 싫었고 물려받은 머리도 너무 평범하여 남들보다 배 이상으로 노력해야 했다는 사실이 자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용이 된 후에는 학원이나 과외 교사의 도움을 받았더라도 일부러 밝히지 않은 채 개천을 자랑하게 된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문제집 한 권 살 수 없었고 배운 것을 저절로 암기할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잠자는 시간을 줄였으며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오로지 나의 수고 덕분이어야 한다. 할아버지의 재력이나 엄마의 정보력, 무관심한 아빠의 유전자가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공립과 사립의 시스템의 차이가 엄존해도 교사의 가르침은 전국이 평준화되었으니 오로지 나의 성실한 노력만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고 믿어야 한다. 공정에 대하여 최신작을 낸 마이클 샌델도 이 점을 지적한다. "하버드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과 유복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자신은 노력과 수고 덕분에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입을 모은다."

천하게 여겼던 개천 생활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것은 용이 된 직후일 뿐이다. 용이 되고 나서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재산, 재능과 미모 등은 노력과 상관없이 모두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운 좋게 귀한 것을 물려받아도 감사하지 않는다. 운이 없는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도 않는다. 행운을 갚아야 할 빚이나 의무라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의 노력으로 성공한 이후에는 태만에 빠진다.

세대를 달리하여 계급 사회와 집안이 수백 년간 유지되었던 것은 가진 자의 의무감 때문이다. 그리스 반도로 이주한 도리아인이나 인더스강으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토착민을 노예로 삼고 계급 사회를 영속화했으나 향락을 즐기는 집단이 아니었다. 스파르타 귀족은 전사가 되기까지 고통스런 훈련을 감당해야 했다. 카스트 최고의 브라만도 신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고행을 감내해야 했다. 말목을 자른 손으로 아들 원술의 목까지 자르려고 한 화랑의 기개가 있었기에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물려받은 것을 빚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타인을 지배하고 학대하려 한다. 최근 배구계의 스타 자매가 SNS를 통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다가 진짜 피해자로부터 폭로를 당하여 출전정지를 당했다. 부모의 우월한 신체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미색까지 겸하여 연봉과 인기가 치솟던 자매였으나 그들의 행동을 제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안하무인이 되어 재능이 부족한 동료를 업신여겼다. 아이돌 배구 스타 모녀에게는 대표로서의 특권만 있었고 신라 화랑의 마음씨가 없었다. 운이 좋아 생긴 특권을 유지하려면 책임감이 요구된다. 학교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갖고 일하지 않는 자들은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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