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순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커피학과 외래교수
커피는 '생각의 도구'이다.
좋은 커피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것은, 향미가 뇌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생각을 이끌어 준 덕분이다. 170만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불을 사용하면서 인류가 맛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견해가 있다. 커피 생두에 들어 있는 물질들이 불을 받아 갈변화, 캐러멜화 반응을 치르면서 다양한 맛이 생겨난다. 하지만 가열하지 않은 상태로도 매력적인 맛을 내는 먹을거리는 자연에 수두룩하다. 따라서 불이 인류에게 맛을 깨우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단언하긴 어렵다.
더욱이 불을 이용할 정도로 두뇌가 발달했던 호모에렉투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이 멸종된 이유를 언어능력을 갖추었던 호모사피엔스의 등장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호모사피엔스는 언어를 주고받으며 신속하게 단체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능력이 서식지와 먹을거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호모에렉투스를 멸종시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는 단순하게 그룹의 행동을 통제하는 소리신호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인류는 언어를 가짐으로써 보이지 않는 대상을 묘사할 수 있었고 상상할 수 있었으며 사유할 수 있게 됐다. 언어는 곧 '생각의 도구'이다.
커피 한 잔은 그 분량만큼 배부르기 위해 마시는 게 아니다. 커피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잠을 쫓는 도구일까, 에너지를 높이는 촉진제일까? 단지, 그런 수준이 아닌 것 같다. 커피는 인류 문화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 맛 좋게 느껴지도록 진화했다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을 단지 살아가기 위한 진화의 결과로만 풀이하는 것은 인간답지 못하다. 좋은 커피를 마시면 지그시 눈이 감기면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커피를 더 많이 마시기 위해 본능적으로 반응한 덕분이라고만 한다며 더 큰 것을 놓치게 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에서 주인공이 마들렌을 먹은 순간 과거의 한 순간으로 이동한 것처럼 생생한 경험을 하는 대목은 맛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혀와 코에 무엇인가 닿은 듯한 느낌을 감지하는 것은 감각(sensation)이고, 그것이 커피임을 알아채는 것은 지각(perception)이다. 지각은 곧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맛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 지각이 반복되면서 인간 고유의 정신활동 덕분에 새로운 정보가 만들어진다. 커피를 반복해 마시면 향미만으로 커피나무가 자란 땅과 기후를 가늠할 수 있고, 재배와 가공에 쏟은 농부의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느낄 수 있다. 목을 타고 내려오는 커피 한 모금이 환희에 차게 하고 때론 눈물짓게 만들기도 한다. 그 한 모금이 우리의 관능을 매만지면서 곧 우리의 일부가 된다.
커피가 선사하는 행복을 느낄 때면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간절함과 다급함이 생긴다. 커피애호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본래 그렇다. 한 잔의 커피를 나누며 같은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언어를 통해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이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소통과 공감 속에 방대한 양의 정보가 오고 갔고, 그 과정에서 지식이 탄생했으며 개개인의 각성은 시대의 계몽으로 이어졌다.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향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류의 언어능력은 곧 생각하는 능력이다. 한 잔의 커피와 그 향미를 말하고 싶은 충동에서 이런 진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