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의 커피가 멋스런 이유

2020.11.02 16:16:28

박영순

커피인문학 저자, 단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외래교수

향을 즐기며 커피를 마시는 것은 멋진 일이다. 꽃, 과일, 아몬드를 감싼 캐러멜, 부드러운 초콜릿을 떠올리게 하는 맛들이 품격 있는 문화를 향유하는 듯한 기분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맛이란 곧 멋이다"는 말이 특히 커피에서 실감나는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커피는 배 부르려고 찾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생사보다는 문화 향유의 도구에 가깝다. 게다가 한 잔의 커피는 예술작품처럼 우리의 관능을 공감각적으로 어루만져 주기까지 한다. 입동을 며칠 앞두고 있는 요즘 같은 늦가을에, 커피는 잔을 감싼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며 다정하게 다가온다. 경직된 몸이 눈 녹 듯 스르르 풀릴 때의 감각은, 찬바람을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벽에 걸린 고흐의 해바라기를 본 순간 온몸에 퍼지는 나가는 따스한 기운과 다르지 않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커피를 사랑했던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은 특히 커피애호가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 그가 1824년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작곡했음에도 결점 하나 없이 관능적으로 완벽할 수 있던 것은 그의 커피를 보면 알 수 있다. 베토벤은 한 잔을 이루는 60알의 커피 가운데 불쾌하거나 자극적인 맛을 내는 원두가 반쪽이라도 섞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취는 한 잔의 커피가 입안으로 들어와 불러 일으키는 향미의 선율을 깨뜨리는 비명 같은 자극이기 때문이다. 커피 향을 즐기는 것은 코나 혀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통로일 뿐이다. 교향곡을 감상하는 주체도 귀가 아니다. 귀는 뇌가 감지할 수 있도록 전기신호를 발생시키는 장치일 뿐이다.

맛이나 미술작품, 음악을 감상하는 곳은 뇌이다. 오감이 감지한 감각(sensation)을 지각(perception)하고, 이를 인지(cognition)해 감성을 만들어내는 부위가 같은 뇌이다 보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맛에 민감하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뇌는 감각되는 전기신호를 물리적으로 종합하고 계산하는 컴퓨터에 그치는 게 아니다. 향미와 예술의 세계에서 뇌의 우수함은 감각을 감성으로 빚어내는데 있다.

슬픈 일을 당했을 때, 흔히 마음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신체의 특정 부위인 가슴이 아픈 게 아니라 뇌의 작용으로 부정적인 감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기원전 4~5세기 고대 그리스의 대철학자들도 이 점에 관한 고뇌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뇌의 감각 중추가 맛을 느낀다는 의학자 알크마이온의 주장을 뒤엎으면서까지 맛은 심장에서 느낀다고 일갈했다. 인간의 감각을 본격적으로 사색한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맛을 뇌의 작용이 아니라 심장의 작용으로 이해했다. 그리스 비극의 감동이나 한 잔의 좋은 커피가 불러 일으키는 행복이 뇌 보다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현상이 빚어지는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겠다.

심장의 입장에서 보면 울컥하는 감동이 한 잔의 커피에서 왔건 명화나 교향곡에서 왔건 상관이 없다. 생각할수록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감성을 보듬는 행복이 늘 가깝게 두고 지내는 한 잔의 커피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고단한 일상에서 '한 잔의 커피로 누리는 행복'을 역설적으로 사치라고 부르는 것은, 그 행위가 곧 문화의 영역에 들어갔음을 방증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은 우리 겨레에게는 멋이다. 한 잔의 커피가 맛을 넘어 멋으로 승화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이다. 커피를 마실수록 감성이 깊어지고, 그 자리가 더욱 멋스러워지는 것은 우리 고유의 미의식이다. 우리에게 멋은 항상 미숙함을 지나 원숙해질 무렵 사골처럼 우러났다. 서구의 문화인 커피가 진정 우리의 것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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