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날 수 없는 포위망

2020.09.29 10:17:20

김혜식

수필가

하늘은 푸르고 드높다. 어느 사이 계절은 가을이다. 풀벌레 소리가 무성한 가을밤, 밖을 나서면 볼을 스치는 밤바람에선 특유의 쌉싸름한 가을 내음이 한껏 묻어난다. 뒤돌아보니 지난여름 급격히 번지는 코로나 19 및, 폭우와 태풍으로 삶이 참으로 힘들었다.

이런 연유로 올여름은 유난히 암울했고 불안했다. 특히 코로나 19는 한 때 사회적 거리 2.5단계가 강조 될 만큼 사태가 엄중했다. 이렇듯 하루하루가 사회의 안전판이 몽땅 무너지는 듯한 시점이어서인지 평상심을 잃고 걸핏하면 심신이 헛발질을 하였다.

올해는 마을 호숫가 근처 논에서 해마다 모내기철이면 들려오던 개구리 울음소리도 제대로 못들은 듯하다. 어김없이 개구리는 울었을 테이고 짝짓기를 하여서 알도 낳았을 것이다. 지난날 그토록 소음으로 작용했던 매미소리도 변변히 듣지 못한 듯하다. 이는 그동안 불어 닥친 삶의 고통과 맞서느라 미처 개구리 울음소리, 매미 소리를 귀담아 들을 마음의 여유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일상에서 코로나19에 대한 두려움과 자연 재해로 중심을 잃고 갈팡질팡 할 즈음, 자연은 말없이 본색(本色)을 갖추고 있었다. 태풍 바비 및 하이선이 온 강산을 뒤흔들었고, 여름철 수십 여 일의 폭우가 쏟아져서 곳곳을 할퀴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들녘엔 곡식들이 따사로운 가을볕에 알알이 영글어서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렇듯 계절은 인간의 고통 및 애환 따윈 아랑곳하지 않은 듯 순리를 제대로 뒤따르고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우린 삶 속에서 시간에 쫓기며 사는 형국이다. 코로나 19가 창궐하기 전 지인이나 친구에게 모처럼 전화를 하면, 늘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았다.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친구와 오랜만의 만남도 미루기 일쑤였다. 돌이켜보니 지난날 이러한 일들이 못내 후회스럽다. 한번 놓친 시간은 평생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에 대하여 논하노라니 문득 떠오른 이상호 시인의 「이웃집 아저씨의 탈출」이란 시 구절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물 샐틈 없이 조여오는/ 시간의 포위망을 뚫고/ 이웃집 아저씨가 달아났다/ 그는 지금 용인공원 묘지 산1번지/ 양지바른 곳에 반듯이 누워/ 안도의 숨을 쉬고 있다.' 이 시에서 항상 시간에 떠밀리는 삶을 사는 게 인간 본연의 모습임을 새삼 깨닫는다. 이 시엔 비로소 인간은 죽음을 맞이해야만 시간이라는 악령(·)의 족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내재 돼 시사 하는 바가 크다.

time(시간) 이라는 명사를 영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단다. '사람'과 '때'라는 낱말을 우리는 가장 자주 사용한다는 고려대학교 연구팀 조사도 있었다. 코로나 19가 창궐한 후 그동안 빈번하게 애용했던 '사람'과 '때'라는 이 단어마저 삶 속에서 상실한 듯하다.

불과 수개월 전 만 하여도 이웃과 마주치면 별다른 경계심 없이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고 좋아하는 계절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하여 아쉬웠다. 이즈막은 이웃을 만나면 외면하게 되고 나도 모르게 멀찌감치 발길을 돌리곤 한다. 또한 집안에서만 지내려고 하니 일상이 너무나 무료하고 지루하다. 하루해가 이토록 길 줄이야….

이 때 현제(賢帝)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 지금 곧 세상을 하직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내게 남겨진 시간은 기대하지 않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며 살라." 라는 언명이 갑자기 생각났다.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나머지, 다시금 시간 포위망 속으로 서둘러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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