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SNS서포터즈 - 고구려비전시관

2020.03.30 10:11:36

(*해당 기사는 코로나19 사태 이전 취재된 기사입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충주시 중앙탑면 입석리에는 오래 전부터 비석 하나가 덩그렇게 서 있었고 세월의 풍파로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어 그 가치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1979년에야 비로소 그 비석의 연구가 시작되고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그 비석이 바로 충주 고구려비인데, 지금은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관 앞은 삼족오(고대 신화에 나오는 태양 안에서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 조형물이 지키고 있다.
전시관은 1층으로 된 건물이 붙어 있는 구조로 전시관을 코스에 따라 둘러볼 수 있게 만들어진 구조다.

처음 가면 전시관 입구가 어디인지 잘 모를 수 있는데, 충주고구려비전시관이라고 적혀 있는 곳이 입구다.

입구에는 우리 충주가 어떤 곳인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그림이 있다. 중원문화의 중심, 국토의 중심고을 충주다.

예로부터 철이 많이 생산돼 철의 고장이다. 육로와 강을 통한 교통의 요충지이며, 구국항쟁의 고장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전통무예 택견의 성지가 바로 충주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 먼저 충주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처음 만나는 삼국시대에서는 백제, 고구려, 신라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충주가 그만큼 중요한 요충지였다는 이야기다. 삼국이 충주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곳에 터를 닦았는지 알 수 있다. 고구려 때 충주는 국원성으로 불렸다. 한자를 살펴보면 나라의 근원이 되는 성이라는 뜻으로 충주를 불렀다.

이렇게 삼국이 충주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충주는 육로 교통의 요충지이자 남한강을 끼고 있는 뱃길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철이 많이 생산돼 무기나 농기구를 생산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남하하면서 427년 평양 천도를 했다. 계속해서 남진 정책을 펼치며 충주, 강릉, 삼척 이남까지 차지하게 됐다.

이렇게 이곳 충주 입석마을은 고구려의 최전선 마을이 됐고 우리나라 유일한 고구려 석비를 남기게 된 것이다.

고구려비 하면 우리가 많이 들었던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는데, 414년 국내성(중국 지린성)에 세워진 것으로 전시관에서 함께 만나볼 수 있다. ​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눈앞에 커다란 말과 함께 갑옷을 입은 무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이 개마무사인데, 고구려 벽화 속에 나오는 무사다. 고구려의 주력부대로 말에도 갑옷을 입혀 적진을 돌파 시 화살이나 창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에는 개마무사만 5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항상 전투의 선봉에 섰던 부대다.

개마무사를 지나 드디어 만나게 되는 충주고구려비는 국보 제205호로 지정됐다. 국원성의 존재를 규명할 수 있고,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이 반영된 것으로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던 삼국의 관계와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다.
4면에 모두 글씨를 새겼는데, 세월의 흔적으로 글씨가 마모돼 일부 글씨는 알아볼 수 없다. 연구와 조사로 파악된 글씨의 내용들을 잘 알아볼 수 있게 전시 하고 있다. 1500년 전 고구려를 만나는데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한 고구려 비석의 가치는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원성이었던 충주에는 고구려비 외에도 다양한 고구려의 흔적이 남았다. 충주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이곳에 남아있는 고구려를 찾아 여행 해보면 어떨까.

/ 충주시SNS서포터즈 그린티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PC버전으로 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