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사태에 대한 소고

2020.03.29 14:39:32

김진영

청주시 도로시설과 주무관

'n번방'을 스치듯 처음 들었을 때 뜬금없이 비슷한 영화 제목이 생각났다. 성 노예, 미성년자, 착취 등의 끔찍한 기사를 읽기 전까지 나는 전혀 상관없는 영화를 떠올릴 정도로 너무나도 무지했다. 텔레그램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그 세계에서 이토록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문득 대학 교양수업 때 공창제도에 대해 토론했던 기억이 났다.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나는 세상이니 이제는 그런 논의도 매우 낡은 주제가 됐구나 싶어 격세지감을 느꼈다.

고릿적부터 끊임없이 성행한 성매매의 그 지난한 옳고 그름의 입씨름을 떠나서 이번 사건은 미성년자 성(性) 착취라는 점에서 심각한 범죄다. 가해자들은 미성년자를 가스라이팅과 겁박으로 글로 옮기기에도 손이 떨리는 요구와 조롱을 해댔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어 통제하는 걸 이른다. 분별력이 약한 어린 나이에 성인 남자들의 교묘한 협박과 조종을 대범하게 뿌리칠 수 있는 이가 몇 있으랴. 그러하니 왜 그런 범죄 대상이 됐느냐고 피해자에 대해 의아해하고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또한 누군가는 모든 남자들이 가해자인 양 의심하지 말라고 볼멘 항변을 한다. 이는 피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약한 자들의 경계 어린 절규를 외면한, 본질을 흐리는 비겁하고도 냉담한 태도다.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고 짐승만도 못한 가해자들이 엄격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목소리를 내주기를 부탁한다.

우리나라에서 성범죄의 형량은 피해자의 고통에 비해 너무 적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사람이길 포기한 범죄에 대해 천인이 공노해 다른 답을 요구하는데 법이 세상의 속도와 그 목소리에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 외국의 법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아동 성범죄에 대해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건 우리도 본받아야 한다.

그 방에서 아동 음란물을 보며 미성년자들을 유린한 모든 사람은 가해자다. 때문에 지금까지 이런 범죄에 대한 전례가 없어 처벌하기 힘들다면 법을 바꾸거나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가면을 벗긴 민낯을 주변 사람들에게 면면이 밝혀 그 추악함을 널리 알렸으면 한다. 처음의 사례를 이번에 반드시 만들어 앞으로 무수히 생길 수 있는 모방 범죄에 대해서도 그에 합당한 죗값을 치른다는 걸 본보기로 꼭 보여 예방하길 바라는 마음이 무척 크다. '빨강 머리 앤'에서 읽은 일화가 떠오른다. 할머니가 한 아이에게 악마가 어떻게 생겼을 것 같으냐고 묻자 아이는 뿔이 달리고 흉측하게 생겼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악마는 신사처럼 다가온다고, 그래야지 인간을 현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악은 평범하다. 어둠 속에서 몸서리치는 범죄를 계획하고 저지르고도 사회에서는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봉사활동을 하는 그 이중성을 보며 내 주위 사람들 중에도 표리부동한 이가 있지 않을까 염려하는 이 상황이 더없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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